경주 석굴암 석굴 ( )

경주 석굴암 석굴 전경
경주 석굴암 석굴 전경
불교
유적
국가유산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동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굴 사원.
이칭
이칭
석불사(石佛寺), 석굴암(石窟庵), 석굴암(石窟庵)
유적/건물
건립 시기
통일신라시대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불전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보(1962년 12월 20일 지정)
소재지
경북 경주시 불국로 873-243, 석굴암 (진현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경주 석굴암 석굴은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동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굴 사원이다. 『삼국유사』에는 751년에 창건하였다고 나오지만,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문서에 의해 742년까지 창건 연대가 올라갈 수 있다. 1960년대의 보수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석굴은 방형 전실과 원형 주실, 반원형의 천장으로 구성하였다. 본존불상과 보살상, 제자, 사천왕 등은 계급적 위상에 따라 배치되었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에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동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굴 사원.
개설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은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 불국사(佛國寺)의 부속 석굴이다. 인공 석굴을 통해 불국토를 구현한 신라 문화유산의 정수(精髓)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에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석굴암의 창건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一然: 12061289)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이세부모 신문왕대」에 따르면, 석굴암은 751년(경덕왕 10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석굴암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대성(金大城: 700774)이 751년에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불사를 세웠다고 하여, 석굴암 창건 연대를 751년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근래에 판독과 역주가 완료된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慶州 佛國寺 三層石塔)[석가탑] 발견 문서, 즉 석탑 중수기인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佛國寺無垢淨光塔重修記)」[1024년]와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1038년], 「불국사탑중보시명공중승소명기(佛國寺塔重布施名公衆僧小名記)」[1038년]에는 경덕왕이 즉위한 742년, 김대성이 중시(中侍)가 되기 이전에 불국사 양 탑의 건축을 시작하여 혜공왕 대에 공사를 마쳤다고 써 있다. 고려 전기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경주 불국사 다보탑(慶州 佛國寺 多寶塔)의 중수에 관한 정보를 담은 이들 문서에 불국사가 742년에 창건되었다고 써 있으므로, 석굴암의 창건 연대도 기존에 알려진 751년보다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742년경에는 석굴암 설계와 건설 계획이 시작되었을 수 있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발견 문서에서 석굴암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 문서들이 『삼국유사』보다 250년가량 앞선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신빙성이 높다.

『삼국유사』에는 석굴암이 완공된 후, 김대성이 신림(神琳)과 표훈(表訓)에게 청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에 각각 머무르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화엄종 승려인 표훈이 석굴암에 주석하였다는 기록은, 석굴암이 불국사와 함께 의상계 화엄종 사찰로 건립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석굴암과 불국사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후대의 기록은 매우 드물다. 「석굴암중수상동문(石窟庵重修上棟文)」에 불국사의 석굴암이라는 뜻으로 ‘불국지석굴(佛國之石窟)’이라는 말이 나오는 정도이다. 다만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실린 조선시대 불국사와 석굴암 기록에, 1703년(숙종 29) 승려 종황(從怳)이 석굴암을 중창하고 굴로 가는 계단을 쌓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참고하면 불국사와 석굴암이 지속적으로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석굴암을 토함산(吐含山: 745m)에 건립한 이유는, 토함산이 신라오악(新羅五岳) 중 동악(東岳)으로 신라인들에게 숭상받던 산이었고, 왜구로부터 신라를 방어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였기 때문이다. 토함산과 가까운 동해에는 호국의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고 맹세한 문무왕(文武王)의 대왕암(大王巖)도 있다. 그에 따라 동해가 내다보이는 위치를 선정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석굴암이 나라를 지키는 호국불교의 중심지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중대 신라는 통일의 기세를 몰아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전력을 기울인 때였고, 그 중심에 경덕왕이 있었다. 석굴암이 창건된 경덕왕 대는 정치적 안정과 내적인 번영의 기틀을 닦고, 정치 · 사회 ·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신라 역사상 가장 번창한 융성기였다. 이 시기에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각 나라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활발하게 국제 교류를 하였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석굴암과 불국사를 창건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774년에 생을 마치자 그를 대신해 나라에서 건설을 마무리하였다고 나온다. 이를 근거로 불국사와 석굴암은 김대성이 자신의 부모를 위해 지은 절이 아니라 신라 왕실의 원찰(願刹)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석굴암을 건립하는 데에는 막대한 물량과 인원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개인이 석굴암과 불국사 대찰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신라 왕실 원찰설은 설득력이 있다. 혜공왕 대 완성된 석굴암은 경덕왕의 원찰이자, 경덕왕의 정치 이념에 따라 신라를 수호하기 위한 국찰(國刹)로 기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덕왕의 안정된 치세에 이루어진 당과의 국제 교류로 인해 성당(盛唐)의 번창한 문화 역시 신라로 유입되었다. 활발한 대외 교류로 신라에 전해진 화려하고 정교한 당나라 불교미술은, 석굴암의 건축과 조형의 우수성을 더욱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왕실의 전폭적인 지지와 숙련된 기술의 축적, 공학적 지식과 건축 공법의 발달이 석굴암 창건을 가능하게 하였다. 석굴암 석굴의 건축구조는 신라인의 창의성을 드러낸 것이며, 우아한 불교 조각의 예술성은 신라 미학의 결정체이다. 석굴암은 당시 신라의 불교문화가 전성기에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인공 석굴로서의 석굴암은 자연 암벽을 파고 들어가 예배 및 수행 공간으로 지은 인도나 중앙아시아, 중국의 석굴과는 다르다. 석굴암은 다듬은 석재와 석판으로 석굴 건축을 하고, 흙과 채움돌을 외부에 쌓아 올림으로써 완성한 종합 건축물이다. 근본적으로 면밀한 계산으로 설계하고 시공한 건축물로서, 당시 신라 사람들의 고도로 발달된 공학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았으면 건설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석굴암의 공간이 1과 √2를 활용한 비례로 구성된 것은, 당시 중국에서 전해진 고대 수학책 『구장산술(九章算術)』을 통해 습득한 수학 지식이 바탕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조선총독부 기사였던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는 당나라 자인 주1이 석굴암 조영에 사용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요네다가 시작하여 우리나라 건축역사학자들이 지속한 석굴암 평면 분석에 따르면, 본존불 대좌의 지름인 주2이 석굴암 구조의 기본모듈이다. 석굴암은 모듈 건축을 통해 동짓날 해돋이 방향으로 공간 대칭축을 정교하게 일치시킨 좌우대칭의 건축이다. 전실(前室)과 주실(主室) 평면, 입면, 천장까지의 높이, 본존불의 높이와 무릎 너비까지 정밀한 기하학적 수리 원리가 반영되었다. 석굴암은 아름다운 예술품일 뿐만 아니라, 신라의 과학과 수학 지식이 집대성되어 완벽하게 구현된 우리 문화유산의 정점이다.

석굴암의 구조

돌을 쌓아 만든 인공 석굴인 석굴암은 정면의 목조건물 안쪽에 있는 방형(方形) 전실과 반구형 돔(dome) 천장으로 마감한 원형 주실로 구성되었다. 현재는 앞이 목조건물로 막혀 있지만, 전실이 처음 건설될 때부터 천장이 있는 건물 형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1960년대의 대대적인 수리 이전 모습처럼 지붕이나 별도의 구조물 없이 외부에 노출된 공간으로 기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주실 상부는 석굴암이 건설될 때부터 반원형 돔으로 덮여 있었으므로, 전실에 목조건축과 지붕이 없었다면 주실로 이어지는 통로가 석굴 입구라는 인상을 주도록 되어 있었을 것이다. 원형 주실의 벽면과 중앙의 본존불 사이에 있는 공간은 본존불 둘레를 따라 돌 수 있게 만들었다. 신도들이 오른쪽 어깨를 안쪽으로 하고 불상을 돌면서 경배하는 불교 의례인 우요(右繞)를 할 수 있게 배려한 공간이다.

너비 약 3.5칸, 길이 약 2칸 규모의 전실은 좁은 통로를 통해 원형 주실로 연결된다. 통로 바로 뒤, 주실 입구에 세워진 2주의 팔각기둥이 전실과 주실의 공간을 분명하게 구획하는 역할을 한다. 기둥은 모두 잘 다듬어진 팔각형 초석 위에 세워졌고, 기둥 가운데는 연꽃잎 모양의 석재로 장식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첫 번째 수리 공사 때, 낮은 아치 모양으로 석재를 다듬어 두 기둥 윗부분을 가로지르게 만드는 바람에 정면에서는 불상의 광배(光背)가 다 보이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보수 당시 파손된 채 땅에 떨어져 있던 아치형 석재를 발견하여 똑같이 만들어 올린 것이라고 한다.

전실 좌우 벽면에는 각각 4구의 팔부중(八部衆)이 마주 서 있어, 석굴 전체가 팔부신중의 호위를 받는 듯한 모습이다. 원형 주실로 들어가는 통로 전면 좌우에는 정면을 향하여 각 1구씩 2구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있다. 통로 양측에는 각 2구씩 4구의 사천왕(四天王)이 마주 보고 있다. 금강역사와 사천왕은 전실의 팔부신중과 함께 주실 입구에서 주실에 있는 불보살과 제자, 권속(眷屬) 등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반구형의 천장에 원형 평면을 지닌 석굴 주실의 최대지름은 6.8m인데, 재는 위치에 따라 6.58m가 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처음 석굴을 설계하고 건축할 때, 정확하게 원을 그릴 수 있는 도구와 수학적 계량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본존불상이 안치된 연화대좌는 높이 약 1.6m, 지름 약 3.7m의 크기이며, 중앙이 아니라 중심축을 기준으로 중앙에서 약간 뒤로 치우친 곳에 놓여 있다. 주실 중앙에서 대좌 지름의 1/3가량 뒤쪽에 대좌를 둔 까닭은, 예배자가 정면에서 중앙의 본존불을 올려다볼 때 불상이 한가운데 놓인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전실과 주실의 규모와 위치만이 아니라, 본존불이 안치될 곳까지 예배자의 시각적인 착각을 고려하여 세밀하게 계산한 배치이다.

석굴 주실 내부는 벽면 역할을 하는 판석이 중앙의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다. 천장 중앙은 자연스럽게 조각한 연화형 천개석(天蓋石)으로 마감하였고, 천장 부분 바로 아래 10개의 감실이 있다. 흙을 파고 돌을 쌓아 만든 석굴이기 때문에 마감재 역할을 하는 판석이 필요하였고, 판석 겉면에 부조를 새겨 내부를 장엄하였다. 벽면 아래에는 대좌처럼 보이는 면석(面石)을 두고, 그 위에 다시 높이 약 2.42m, 넓이 약 1.21㎡의 화강암 판석 15매를 병렬하여 벽체처럼 만들었다. 보살과 천신, 석가모니의 제자를 판석에 새긴 부조와 감실에 안치된 조각까지 합치면 모두 24구의 조각이 주실에 있다. 원래 10개의 감실마다 보살상이나 천신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8구만 남아 있다. 본존불 앞뒤에 작은 5층 석탑이 있었다는 일제강점기의 구전(口傳)이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주실 내부가 석탑을 둘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넓지 않고, 주실을 부처가 상주하는 불당(佛堂)이라고 보면 석탑을 두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계위(階位)에 따라 배치한 조각

석굴암에는 주실의 본존불과 벽면 부조, 감실 조각을 포함하여 24구의 조각과 전실의 팔부중, 통로의 금강역사와 사천왕까지 모두 38구의 불교 조각이 있다. 본존불을 뺀 나머지 조각은 앞면만 조각된 부조이며, 감실에 안치된 조각은 환조처럼 보이지만 입체감이 강한 부조이다. 전후좌우에서 볼 수 있는 완벽한 입체 조각은 중앙의 본존불밖에 없다.

대형 화강암을 다듬어 조각한 본존불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의 옷차림에 결가부좌를 하고,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 땅을 짚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불좌상이다. 불상 바로 뒤에는 가지런하게 정리된 연꽃잎이 묘사된 두광(頭光)이 굴 벽면에 붙어 있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원형 두광은, 예배자가 정면에서 불상을 바라보았을 때 두부 전체를 감싸며 빛을 발하는 듯한 위치에 있어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불상에 두광이 바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어 그 크기와 위치가 효과적으로 보이는데, 이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석굴암만의 특징이다.

본존불의 넓은 어깨와 팽만한 가슴, 양감이 풍부한 신체는 신라 사람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인체의 미를 재현한 것이다. 조각가의 예술적 감수성과 숙련된 기량은, 자연스러우면서 부드러운 신체 곡선과 원숙하면서도 사실적인 세부 묘사에서 잘 드러난다. 높이 치솟은 눈썹, 아래로 가늘게 내리뜬 눈,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이 보여 주는 조화는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이 있다. 조각가의 예리한 감성은 이마 끝까지 뻗은 눈썹, 살짝 근육이 엿보이는 팔의 굴곡, 얕게 새긴 눈동자, 손가락 마디와 손톱 등 미세한 부분도 놓치지 않았다. 어깨를 펴고 등을 똑바로 세워 정좌(正坐)한 자세에서 나오는 긴장감, 인체의 곡선을 드러내는 얇은 옷, 자연스러운 옷 주름의 묘사를 통해 8세기 신라 조각이 중국 당나라 미술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평온하면서 고요한 본존불의 모습은 석굴이 지닌 특유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내밀한 깨달음의 세계를 구현한다.

본존불이 맺고 있는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는 순간 취하였던 수인으로서, 부처의 성도(成道)를 상징한다. 본존불이 경전에 나타나는 어느 부처를 표현한 것인가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현재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에 앞서 본존불이 아미타불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석굴암이 동해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고, 아미타불의 광명(光明)을 뜻하는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현판이 있었다는 전언, 그리고 부석사(浮石寺) 대웅전에 안치한 아미타불과 비슷하다는 점이 그 근거였다. 다음으로 나온 주장은 비로자나불이라는 설이다. 석굴암은 『화엄경(華嚴經)』에 근거하여 건립되었는데, 『화엄경』의 주불(主佛)이 비로자나이기 때문에 본존불은 처음부터 비로자나불을 염두에 두고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또 비로자나불의 속성이 광명인데, 본존불을 동향(東向)으로 안치하여 아침에 뜨는 동해의 햇살을 받게 한 것이 바로 비로자나불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항마촉지인은 모든 부처가 깨닫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치는 단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를 제외하면 본존불에 특별한 도상의 특징이 없기 때문에 존명(尊名) 비정에 논란이 빚어졌다.

인도를 순례한 당나라 구법승(求法僧) 현장(玄奘: 602~664)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깨달음의 성지(聖地) 보드가야에서 현장이 보았던 정각상(正覺像) 이야기가 나온다. 현장의 귀국 이래 유행한 항마촉지인 불좌상이 중국과 동아시아 전역에서 유행하였고, 신라에도 같은 도상과 형식이 전해졌다. 석굴암 본존불은 동향으로 앉아 항마촉지인을 한 대각사(大覺寺)의 석가모니불과 손 모양, 앉은 방향, 무릎과 어깨의 폭, 좌상의 높이 등 신체 치수가 같다. 보드가야의 정각상을 재현한 석굴암 본존불은 경주가 신라인들의 불국토라는 자부심을 드러낸다. 석굴암 본존불을 범본으로 한 항마촉지인 불좌상은 신라 하대와 고려시대까지 널리 유행하였다.

본존불 둘레에 세워진 판석 부조는 입구 쪽부터 각각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문수보살(文殊菩薩)보현보살(普賢菩薩)이 대칭으로 안치되었다. 본존을 둘러싼 좌우의 조각들이 차례로 교차 배열되는 석굴암의 일반적인 구성 원칙에 따라 좌우 각각 5구씩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들이 시립(侍立)하고 있으며, 가장 안쪽, 본존불 바로 뒤에는 십일면관음상(十一面觀音像)이 있다. 감실에는 도상이 명확하지 않은 5구의 보살상과 관음보살, 지장보살, 유마거사상이 안치되었다. 주실의 모든 부조상들은 본존불을 향한 자세로 만들어져 석굴 내에 안정감과 통일된 질서 의식을 보여 주고 있으며 권속들의 배치는 철저하게 불교의 계위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가장 바깥쪽에는 팔부중, 금강역사, 사천왕으로 이어지는 호법신(護法神)을 두고, 그 안쪽에 천신과 보살상, 제자를 두었으며, 가장 안쪽에 있는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은 본존불 다음가는 위상을 갖는다.

주실 벽면의 부조상들은 8세기 이전에는 없었던 조각으로, 이 시기 활발한 국제 교류를 통해 새로 신라에 유입된 불교 도상들이다. 석굴암 주실의 부조상들은 도상도 다양하지만, 낮은 부조임에도 입체감을 잘 드러내는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신라 불교 조각의 정수이자 아시아 불교미술의 정점(頂點)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판석 부조들은 이전의 신라 조각과는 달리, 7~8등신의 늘씬한 신체 비례와 입체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자연스러운 양감 처리로 숙련된 조각가의 기량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당나라에서 들어온 새로운 조각 양식을 신라화한 것이다.

주실 초입 양측의 범천과 제석천은 각각 하늘을 다스리는 천신이며, 거의 모든 대승 경전에서 자주 언급되는 신화적인 존재이다. 두 상 모두 옆의 보살상 방향으로 머리와 몸을 돌린 모습으로, 머리에는 비슷한 보관(寶冠)을 썼고 얇은 옷이 신체에 밀착된 모습이다. 범천은 왼손으로 정병, 오른손으로 중생의 번뇌를 털고 씻어 내는 불자(拂子)를 들고 있으며, 제석천 역시 불자와 악마를 항복시키는 지혜의 무기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다. 왼손 손바닥에 있는 금강저는 위아래가 5갈래로 갈라진 오고저(五錮杵)이다. 입구 양측, 두 번째로 섬세하게 새겨진 연화대 위에 서 있는 보살상 역시 부드러운 인체 윤곽과 섬세한 천의, 복잡하지만 단정하게 표현된 영락 장식이 돋보인다. 본존불을 향한 우측 두 번째 조각은 오른손에 범협(梵莢)이라고 불리는 경전 묶음을 들고 있으며, 좌측의 두 번째 조각은 작은 그릇을 들고 있다. 이들을 각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다음으로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석가모니의 십대제자(十大弟子) 부조이다. 나한(羅漢)이나 조사(祖師)상은 중국에도 많이 있지만 석가모니의 제자 10인을 나란히 표현한 예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10인의 제자들은 얼굴과 옷, 들고 있는 지물(持物), 신발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개성이 강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조각가가 제자들의 성격을 파악하고 이를 조각으로 구현해 낸 것으로 보인다. 우측 입구 쪽에서 두 번째 조각은 연로한 노인의 모습으로 표현된 가섭(迦葉)으로 여겨진다. 또 본존불을 향하여 좌측에서 다섯 번째 조각이 석가모니의 가장 젊은 제자 아난(阿難)으로 추정될 뿐, 다른 제자들의 명칭은 정확하지 않다.

본존불 바로 뒤에 있는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11개의 얼굴을 갖추고 있는 변화 관음이다. 얼굴이 11개인 것은, 불교적으로 신앙과 수행이 다른 단계에 있는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관음보살이 다른 모습을 갖추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중생에 맞추어 다양한 얼굴로 다가가 자비로 포용하고 구제한다는 대승불교의 입장이 함축된 관음보살이다. 경전에 의하면 십일면관음은 본래의 얼굴을 제외하고 머리 앞면에 3개, 좌우에 각각 3개, 뒷머리에 1개, 정상에 1개의 얼굴을 가졌다. 석굴암의 십일면관음상은 부조이기 때문에 뒷머리의 얼굴은 표현되지 않았다. 나머지 10개의 얼굴 가운데 우측 하나, 정상부 하나의 얼굴이 떨어져 8개밖에 없었던 것을 1960년대 석굴암을 보수할 때 만들어 넣었다. 정상에는 원래 부처의 얼굴이 표현되어야 하지만, 광배까지 갖춘 화불을 만들어 올려 경전의 내용과는 달라졌다. 십일면관음보살을 본존불 바로 뒤에 배치한 것도 관음이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보살일 뿐 아니라, 본존불의 권능과 자비를 구현한 상징적인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원형 주실 천장과 벽면이 맞닿은 곳에는 좌우 5개씩 10개의 말굽형 감실이 있고, 그 안에 각 1구씩 8구의 다양한 조각상들이 안치되어 있다. 비어 있는 2개의 감실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는지, 후대에 상이 없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감실이 높지 않은 까닭에 조각들은 높이 90㎝ 내외의 크기에 편안하게 앉은 좌상 형태로 만들어졌다. 저마다 다른 지물을 들고 있거나 다른 자세를 취한 보살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도상이 판별되는 것은 지장보살과 유마거사에 불과하다. 우측 세 번째 감실의 보살이 왼쪽 다리를 세우고 턱을 받친 사유(思惟)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특이점은 없다. 왼쪽 네 번째 감실의 조각상은 아무런 보관도 쓰지 않은 민머리를 하고, 배 가까이에 둔 왼손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어 지장보살로 보인다. 그다음에 있는 다섯 번째 감실의 조각은 다른 감실상들과 달리 보살의 형태가 아니라 세속인의 모습이다. 늙수그레한 얼굴에 길게 늘어진 도포 같은 옷을 입었고, 손에는 부채 모양의 주미(麈尾)를 들었으며, 오른쪽 다리를 세우고 몸을 왼쪽으로 기울여 말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재가(在家) 신자의 대표인 유마거사(維摩居士)임을 알 수 있다.

본존불이 안치된 석굴 주실을 밖에서 지키는 역할을 하는 호법신중은 가장 바깥쪽의 팔부중(八部衆)부터, 통로 입구의 금강역사, 통로의 사천왕 순으로 배치되었다. 전실로 알려진 방형 공간은 온전히 팔부중이 수호하는 곳이다. 전실 좌우 벽면에 있는 각 4구의 상은 현재 입구 오른쪽 바깥에서 안쪽으로 가루라(迦樓羅) · 마후라가(摩喉羅伽) · 야차(夜叉) · 천(天), 좌측 바깥에서 안쪽으로 아수라(阿修羅) · 긴나라(緊那羅) · 건달바(乾闥婆) · 용(龍)의 순으로 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상의 비정은 명확하지 않은데, 대체로 특징이 분명한 조각 중심으로 비정하면 다음과 같다.

가루라는 새의 특성을 반영하여 투구 양옆에 새 날개가 새겨졌으며 삼지창을 들었고, 다른 상보다 마멸이 심한 야차는 입에 염주형 구슬 장식을 물고 있다. 마후라가와 천의 도상적 특징은 명확하지 않다. 아수라는 파손이 심하며, 상체는 미완의 조각으로 여겨질 만큼 완성도가 떨어지고 하반신은 잘 맞지 않는 부분을 붙여 놓았다. 긴나라는 긴 창을 들고 있는데, 다른 조각과 달리 정면으로 직립한 모습이라 후대에 조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달바는 머리 위에 사자 가죽을 썼고, 용은 용이 표현된 용관을 썼다. 이들 8구의 신장 조각은 주실에 있는 부조에 비하여 조각 수법이 떨어지고 조각도 덜 정교한 편이며, 마모된 정도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제작 시기가 다르다고 보고 있다. 통일신라의 탑 부조로 팔부중이 새겨진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8구의 신장상을 기획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중 일부가 파손되어 후대에 다시 조각해 맞추어 넣은 것으로 보인다.

주실로 들어가는 통로 입구에는 정면을 향해 위협적인 자세로 서 있는 금강역사가 있다. 금강역사는 사찰이나 탑 입구에서 신성한 불국 세계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 두 역사상 모두 무릎까지 오는 짧은 치마를 입고 상체를 드러낸 채 각각 한 팔은 아래로, 반대편 팔은 위로 치켜들고 으르는 자세를 취하였다. 쇄골과 가슴뼈, 목과 가슴의 근육까지 굵은 선으로 표현한 상반신에는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이 담겨 있으나, 인체 비례와 팔의 근육 등은 사실적인 모습이 아니다. 8등신에 가까운 주실의 부조가 섬세한 조각 선으로 이루어진 것과 달리, 금강역사는 굵고 투박한 조각과 바람에 날리는 듯한 치마 끝자락으로 힘과 역동성을 강조한다. 일제강점기 제1차 수리 당시 주실 내부에 쌓인 흙더미에서 금강역사상의 두부와 왼팔, 왼손이 작은 탑과 함께 발견되었으나, 통로 입구의 금강역사와는 관계가 없다.

사천왕은 수미산의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4인의 천왕으로, 동방 지국천(持國天), 서방 광목천(廣目天), 남방 증장천(增長天), 북방 다문천(多聞天)을 말한다. 석굴암의 사천왕은 통로에 각각 2구씩 배치되었다. 4구 모두 악귀를 밟고 갑옷을 입은 무장의 모습이며, 우측 두 번째 천왕을 제외하면 모두 긴 검을 들고 있어 도상적으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신발을 신은 채 꿇어 엎드리거나 주저앉은 악귀들을 밟고 선 모습은, 어떤 장애와 어려움도 물리칠 수 있는 강한 힘이 있는 존재임을 시사한다. 천왕들은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 동서남북을 지키는 모습이지만, 좌측 두 번째 천왕만은 정면을 바라보는 얼굴에 입체감이 강하다. 이는 후에 보수된 탓이다. 우측 두 번째 작은 보탑(寶塔)을 들고 있는 천왕만 북방 다문천(多聞天)으로 확실히 비정할 수 있다. 이 탑의 파편은 1962년 수리 당시 땅속에서 발견되어 복원한 것이다. 사천왕의 갑옷은 주실 부조상들의 옷처럼 얇게 처리되었는데, 이는 얇은 옷 위로 인체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통일신라 전성기 조각 양식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다.

석굴암의 역사

신라 말기까지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신라 사람들의 신앙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건국된 이후 개경이 수도가 되고, 약 1000년 동안 신라 수도였던 경주가 동도(東都)가 되면서 국가의 중심지에서 멀어지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석굴암은 지방의 암자로서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삼국유사』를 제외하면 석굴암과 관련한 기록 역시 불국사 사찰 역사서와 일부 기행문에서 간간이 언급되는 정도이다. 실제로 석굴암의 역사적 변천 과정이나 사람들의 인식에 관해 언급한 고려시대의 기록은 『삼국유사』 외에는 남아 있지 않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발견 문서에서도 석굴암을 거론한 적은 없고, 조선 전기에 간행된 관찬 지리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81년]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에도 석굴암이나 석불사에 관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석굴암이 언급된 『불국사고금창기』와 정시한(丁時翰)이 쓴 『산중일기(山中日記)』 등의 문헌은 모두 조선 중기 이후에 속하는 자료들이다. 조선 후기와 말기의 문헌에는 석굴암에 올라간 사람들이 쓴 시문이나 중수와 관련한 기록들이 실려 있다.

『삼국유사』 이후 석굴암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이채(李埰: 1616~1684)의 『몽암선생문집(蒙庵先生文集)』이다. 『몽암선생문집』 2권에는 이채가 경주부윤에게 준 시가 실려 있는데, 그중에 골굴암(骨窟庵)과 석굴암이 보고 싶어 이견대(利見臺)에 이르렀고, 석굴암과 골굴암을 탐방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전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채가 석굴암에 올랐던 1670년(현종 11)에 석굴암이 선비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석굴암이 중요하게 언급된 것은 정시한의 『산중일기』이다. 1688년(숙종 14) 석굴암에 올랐던 정시한은, 석굴의 전실과 후실의 석상(石像)들이 바르고 가지런하며 완전한 형태로 놓여 있었으며, 입구에는 무지개 모양의 문이 있다고 썼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본존불과 좌대, 주벽의 여러 조각들, 천개석이 모두 가지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면 정시한이 올라갔을 무렵에는 석굴암이 쇠락하거나 무너진 상태가 아니었고, 석굴의 보존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였던 것이다. 정시한의 『산중일기』는 17세기 후반 석굴암의 현황을 자세히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산중일기』와 홍세태(洪世泰: 16531725)『유하집(柳下集)』에 실린 「석굴(石窟)」 등의 여러 시문 등을 통해 볼 때, 석굴암은 불국사, 골굴암과 함께 조선 후기에 널리 알려진 경주의 중요한 관광 코스였으며, 많은 승려와 묵객(墨客), 신도들이 방문하였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석굴암 암자에 상주하는 승려도 3명4명 정도 있어서 어느 정도 관리되고 있었고, 전주와 원주 등 각지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석굴암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것으로 보인다.

문인들이 남긴 문집만이 아니라 석굴암의 모습은 그림을 통해서도 그 존재가 입증되고 있다. 조선 후기 이름난 관광지로서 석굴암과 골굴암이 그림 속에 등장한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진경산수화가 정선(鄭敾: 1676~1759)이 1733년(영조 9)에 그린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에 ‘골굴석굴’이라고 쓴 그림이 있다. 여기에는 목조건물이 있어 석굴암에 원래 목조 전실이 있었다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교남명승첩』에 그려진 ‘골굴석굴’은 골굴과 석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골굴암 석굴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또 1750년대 이후 제작된 지도인 『경주도회(慶州都會)』 「좌통지도(左通地圖)」에는 석굴과 골굴이 분명하게 따로 그려졌는데, 그림 속 골굴에는 목조건물이 있지만 석굴이라 쓰인 데에는 암자만 있고 목조건물이 없다.

조선 후기 이후 석굴암의 중창 및 보수와 관련한 역사 기록은 상당히 소략한 편이다. 활암(活庵) 동은(東隱)이 펴낸 『불국사고금창기』[1740년 초간, 1805년 추보]에는 1703년에 종황이 석굴암을 중창하고 굴 앞의 돌계단[石階]을 정비하였으며, 1718년(숙종 44)에는 태겸(太謙)이 중수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창 화주만 밝혔을 뿐이고, 중창 규모가 어느 정도이며 어디를 어떻게 중수하였는지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1961년1963년에 실시한 석굴암 수리 공사 중에 석굴암에 있는 암자 북쪽 화장실에서 「석굴암중수상동문」이 새겨진 목제 현판이 파손된 채로 발견되었다. 이 현판에 쓰인 「석굴암중수상동문」은 1891년(고종 28) 손영기(孫永耆)가 울산병사(蔚山兵使) 조순상(趙巡相)의 후원으로 석굴암을 중수한 것을 기념하여 쓴 상동문의 일부이다. 상동문 전체 글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 오노 겐묘[小野玄妙: 18831939]가 쓴 『극동의 삼대예술[極東の三大藝術]』에 실려 있는데, 오노 겐묘가 어떤 경로로 「석굴암중수상동문」 전문을 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상동문에는 당시 석굴암 중수를 위해 조순상이 후원하고 인근 신도들이 계를 맺어 공양하였다고 쓰여 있다. 조순상은 순찰사 조씨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정확히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석굴암 인근 노인들이 석굴암을 ‘조가절(趙家寺)’이라고 지칭한 이유가 조순상의 시주로 중수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석굴암중수상동문」은 목조건물의 기둥과 들보를 올리는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글이기 때문에, 석굴암 입구에 목조 전실이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반면, 목조건물 건축 과정에 대한 찬탄으로 가득하여 석굴암 부속 암자 건설에 관한 기록이라는 주장도 있다.

석굴암에 관한 전근대의 기록은 1891년의 「석굴암중수상동문」이 마지막이며, 석굴암은 이후 빠르게 쇠락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병탄 이전인 1902년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와 1905년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의 일본 학자들이 조선을 조사하러 와서 경주 불국사를 방문하였지만 석굴암에는 오르지 않았다. 이들은 조선 침탈 이전에 전국 곳곳의 유적을 조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석굴암의 존재는 몰랐다. 통감부 시절인 1907년경 토함산을 넘어 동해안 지역으로 배달을 가던 우편배달부가 범곡(凡谷) 근처에서 능 같은 것을 발견하였고, 그 안에 석인(石人)이 많다는 내용을 경주 우체국장 모리 바스케[森馬助]에게 보고하면서 석굴암의 존재가 경주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또, 경주 사람과 독일인 신부 에카르트가 1909년에 석굴암을 발견하였다는 설도 있다.

모리 바스케가 당시 군수 양홍묵(梁弘黙)에게 석굴암 관련 보고를 하자, 부군수였던 일본인 기무라 시즈오[木村靜雄]와 고적 애호가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함께 답사를 하였다. 답사 후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에게 보고하였고, 소네가 1909년 직접 석굴암에 올랐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석굴암을 소네 통감이 발견하였다고 호도하기 시작하였다. 1891년 조순상의 중수가 있었고, 석굴암에 바치는 향화(香火)와 공양이 이어졌다는 구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석굴암을 처음으로 발견하였다는 주장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당시 조사 결과 석굴 내부의 보존 상태가 상당히 불량하고 쇠락한 상태였음은 분명하지만,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석굴암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근대의 보수와 복원

국권피탈 후, 1912년 석굴암을 방문한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석굴암을 통째로 서울로 옮기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여러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가 석굴암의 보호 및 보수를 위한 방안을 검토하였고, 1913년부터 석굴암 수리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때의 완전한 해체 및 수리 공사까지 포함하여 일제강점기에만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제1차 수리는 1913년1915년, 제2차 수리는 1917년, 제3차 수리는 1920년1923년에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석굴암의 수리 및 복원을 대단한 자랑으로 삼아 대내외적으로 적극 홍보하였다. 3년 동안의 제1차 수리에 들어간 공사비는 2만 2724원 54전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1912년 총독부 소속 토목기사 기코 도모타카[木子智隆]는 석굴암을 조사한 후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천장의 1/3이 무너져 생긴 구멍으로 흙이 떨어지고 있으며, 불상과 부조가 훼손되고 있어 긴급한 수리가 필요한 건조물(建造物)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총독부 기사 쿠니에다 히로시[國枝博]가 석굴암 수리 복명서(復命書)를 작성하였고, 제1차 수리 공사의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였다. 석굴암을 전면 해체하고, 원래의 석재를 그대로 사용하되 부족한 부분만 보강하며, 안 보이는 이면에는 콘크리트를 부어 원상이 파괴되는 것을 막는다는 원칙 아래 제1차 수리가 진행되었다. 1913년 10월에 먼저 석굴 천장에 목제 가구(架構)를 설치하여 해체 공사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1914년 석굴을 완전 해체하였다. 공사 3년차인 1915년 5월 석굴 재축조를 완료하였다. 당시 석굴 바닥 아래를 관통하는 지하수를 발견하였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조를 만들고 납관과 연결하여 용출수가 굴 밖으로 배출되게 하였다. 하지만 용출되는 물의 양과 용출 상황, 석굴과의 관계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임시방편이라고 평가될 만큼 용출되는 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새로운 재료로 각광받던 시멘트를 사용해 내구성을 높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멘트는 석조물을 약화하고, 석굴을 하나의 응결된 콘크리트처럼 만드는 등 여러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이때 비롯된 문제는 현재까지도 완벽히 해결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불거진 문제는 굴 내 누수 현상이었다. 제1차 수리 준공 후 2년이 못 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누수 문제는 점차 강도가 심해져 거센 비판에 직면하였고, 결국 1917년 6월부터 1개월간 진행된 제2차 수리로 이어졌다. 공사는 총독부의 시마이[島井] 임시 감독이 600원의 보조금을 받아 진행하였다. 제2차 수리 공사에서는 봉토를 제거하고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돔 표면에 석회 모르타르와 점토층(粘土層)을 만들고, 그 외부에 방사선상으로 유도한 암하수(暗下水)를 설치한 후, 상부에 다시 흙을 덮고 잔디를 깔았다. 하지만 석굴 상부 천장 외부에 석회 모르타르를 덮는 것은 임기응변 조치였을 뿐이며, 누수와 그로 인한 불상 및 부조상들의 오염을 원천적으로 방지하지는 못하였다.

제2차 수리가 끝난 지 3년 만에 다시 대규모의 중수 공사에 착수해야 하였다. 누수만이 아니라 석굴 정상부가 침수되는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굴 내 습도가 과다하게 높아졌다. 또 옛 경관을 파괴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굴 입구 석축과 노출된 굴 입구 모양이 마치 터널처럼 보인다는 비판을 받아, 1만 6985원을 들여 다시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 1920년 9월부터 1923년까지 약 4년에 걸친 제3차 수리 공사는 누수를 잡는 데 집중하였다. 누수 부위를 찾기 위해 콘크리트 돔 외벽 석축을 모두 제거하여 돔 천장부의 균열이 간 2곳을 보수하고, 균열부와 주위에 콘크리트를 증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생긴 돔 외면의 요철을 균등하게 다듬기 위해 모르타르를 타설하였다.

콘크리트와 모르타르로 돔 전체를 고르게 만든 뒤에는 방수를 위해 아스팔트를 고르게 바른 후, 잘게 부순 돌을 쌓고 다시 봉토를 하였다. 잘게 부순 돌을 쌓은 이유는, 빗물을 한 번 여과시켜 석굴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 제일 아랫부분은 ‘U’ 자형으로 돔과 직결되는 배수로를 콘크리트로 만들어 연결함으로써, 콘크리트 돔에 빗물이 직접 닿지 못하도록 시공하였다. 납관을 통해 수조로 연결하였던 지하 용출수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함에 따라, 3차 수리에서는 돔 외부를 돌아 직접 수조로 연결되도록 암석을 파고 돌로 물길을 연결하였다. 이 역시 석굴의 지반과 수위가 가까워지는 결과를 낳아 누수를 막는 효과가 적절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3차에 걸친 중수에도 불구하고 석굴암 내부에는 결로 및 침수 현상이 계속 발생하여 부분적, 일시적인 보수가 끊이지 않았다.

현대의 복원 공사

1950년대부터 석굴암 보존과 보수에 관한 문제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 학계와 언론계, 문화재 분야의 관심과 정부의 지원 아래 석굴암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는 주로 누수 · 결로 등의 자연현상과 불상을 비롯한 조각상들의 심한 풍화 현상, 그리고 일제강점기 수리로 인한 굴 자체의 구조 및 조각의 위치 배정에 대한 검토에 집중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역시 누수와 결로였다. 전면적인 중수를 통해 인위적으로 석굴의 습도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조사에 이어 1962년~1964년 3년 동안 집중적으로 석굴과 수광전, 3층 석탑, 요사를 보수하였다.

1960년 배기형은 석굴의 돔을 통해 내부로 유입되는 물을 막기 위해 제1차 수리 공사 때 씌운 콘크리트를 완전히 감싸는 콘크리트 벽을 외부에 추가하여 이중으로 돔을 설치하고, 전실에 지붕과 출입문을 달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중의 돔을 설치하면 하중이 더해져 석굴 자체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이유로 배기형의 보수 설계안은 폐기되었고, 대신 건축가 김중업(金重業)이 설계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김중업 역시 1962년 감독관에서 해임됨으로써, 이 시기 석굴암 보수를 주관한 문화재위원회에 건축 전문가가 없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또한 일제강점기와는 달리 한국인들이 석굴암 수리 공사를 주도하게 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석굴암의 원형에 관한 논쟁이 불거졌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수리 복원 공사가 원형대로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의구심에서 시작되었으며, 전실 팔부중의 배치 및 전실 평면 형태, 목조 전실 가설, 돔 전면의 광창(光窓) 설치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 석굴암의 전실 팔부중 배치와 목조 전실, 광창 등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어 석굴암의 원형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현대의 복원 공사로 바뀐 가장 큰 부분은 목조 전실을 설치한 점이다. 수리 공사를 할 때 수습된 기와와 와당, 정선의 「골굴 · 석굴도」에 목조건물이 그려졌다는 점 등을 들어 전실 위에 지붕을 얹고 앞에 목조건물을 세웠다. 현재 석굴암 입구의 목조건물이다. 그러나 팔부중 상단에 지붕이 있었다는 증거는 부족하며, 목조건물을 세울 수 있는 기둥 자리도 확인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사진으로 보면 금강역사상 윗면에 지붕처럼 돌출된 석재가 있어, 원형 주실로 들어가는 통로 바깥 부분과 전실은 처음부터 지붕이 없는 개방형 구조로 설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으로 두드러진 변화는 팔부중상을 4구씩 나란히 배치하여 일직선으로 병립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벽면에 3구씩, 입구 쪽에 1구를 두어 ‘ㄷ’ 자로 금강역사와 마주 보게 되어 있었던 것을 직선상으로 편 이유는 팔부중을 새긴 판석들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인데, 일제강점기에 변형되었으므로 이를 바로잡는다는 의미였다. 상하부 석재의 상태로 미루어 팔부중들은 꺾인 형태로 배치되었다는 주장이 다수이다. 또 금강역사상 사이에 석굴 내부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현대의 복원 과정에서 논의가 활발하였던 쟁점 중 하나는 광창의 설치였다. 수리 공사 중에 광창의 부재로 여겨지는 석재가 발견되어 원래 정면 윗부분에 광창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이 역시 석굴의 구조상 광창이 들어갈 위치에 시공하는 일이 어렵고, 사후의 유지관리도 어렵기 때문에 원래 광창은 없었다는 주장이 우세하였다. 하지만 곡선으로 다듬어진 부재가 남아 있어 광창설은 계속될 전망이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유사(三國遺事)』
『몽암선생문집(蒙庵先生文集)』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

단행본

미술사와시각문화학회, 『석굴암 기초자료집성』(불국사박물관, 2014)
강희정, 『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 일제강점기 석굴암론』(서강대학교 출판부, 2012)
『석굴암수리공사보고서』(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67)

논문

우동선, 김태형, 「배기형의 「경주 석굴암 보수공사 설계도」(1961)에 관한 고찰」(『건축역사연구』 123, 한국건축역사학회, 2020)
윤재신, 「석굴암의 돌은 말한다: 석불사 석굴의 건축 평면과 벽면 설계」(『건축역사연구』 128, 한국건축역사학회, 2020)
강현, 「석굴암 석굴의 수리역사와 보존의 쟁점」(『경주 석굴암 현황 및 구조 국제학술회의』, 한국건설기술연구원·서라벌문화재연구원, 2017)

기타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인터넷 자료

주석
주1

중국의 당나라에서 길이를 잴 때에 쓰던 자. 흔히 1척은 10촌이 되는 길이이나 대척(大尺)과 소척(小尺)에 따라 길이를 재는 기준이 달랐다. 우리말샘

주2

약 363.6㎝. 1척은 약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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