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은 정토사상의 발달과 함께 중국, 우리나라, 일본 등 널리 유행하여 불상이 제작되었고, 중국은 6세기 이후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7세기 후반경에 많이 유행하였다.
우리나라는 신라 선덕여왕(재위632∼647) 때 자장(慈藏)이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를 저술하면서 정토신앙이 시작되었으나 명문으로 확인되는 가장 이른 아미타불상은 백제의 영토인 충청남도 연기 지역에서 출토된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불비상(673년 추정)이다. 불비상의 정면에 아미타삼존이 배치되어 있고 가장자리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어 7세기 후반기에 도상과 존명이 성립되었음이 확인된다.
이후 도상과 명문 등으로 확인된 군위 석조아미타여래삼존상(7세기), 719년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굴불사지 아미타삼존입상(8세기) 등 여러 아미타불상이 조성되는 등 다양한 모습의 아미타상이 유행하게 된다. 아미타불의 수인은 경전에 언급되지 않아 일률적이진 않은데, 초기에는 오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무릎 위에 두는 형식이 나타나며, 8∼9세기경에 이르러 왼손이 엄지와 검지 혹은 중지와 구부리는 아미타9품인이 성립된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조각 및 불화 등 다수의 작품들이 제작되며, 조선시대에는 종파에 한정되지 않고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유행하였다.
아미타불은 한량 없는 광명을 발하는 부처의 무량수불(無量壽佛) 또는 수명이 한량 없는 부처라는 뜻에서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한다. 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등 정토삼부경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뜻을 가지고 살아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48대원(四十八大願)을 세웠다.
아미타불은 불교가 유입된 삼국시대부터 조성되었을 것이나 7세기 이후 전 시대에 걸쳐 고르게 제작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집중적으로 제작되며, 고려시대에는 조각 및 불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확대 조성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유행하게 된다.
아미타불상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처로 우리나라는 존명과 도상이 7세기 이후에 정립되지만 정토신앙의 유행으로 불교 전래 이후 전 시대에 걸쳐 발원계층을 초월하여 많이 제작된 여래상이다. 특히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국가적 혼란 시기에 더욱 성행하면서 미타전, 극락전, 무량수전 등의 독립된 전각에 본존불로 봉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