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이다.
연곡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신라시대 연기(緣起 창건설과 도선(道詵, 827~898) 창건설이 있다. 연기 조사는 8세기 중반 구례 화엄사를 창건한 승려이며, 선각국사 도선은 9세기에 활동한 승려이다. 연기는 화엄종의 조사이므로 연기가 창건했다면 연곡사는 화엄의 도량이었을 것이고, 도선은 선문의 조사이므로 도선이 창건했다면 선문의 도량이었을 것이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동승탑을 도선의 승탑으로 보기도 한다.
연곡사에는 고려 초 왕융이 찬술하고 979년(경종 4)에 세운 「현각선사탑비」가 남아 있으나, 파손이 심하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1924년에 찬술된 「연곡사사적비」에서는 현각이 선(禪)과 교(敎)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내용 등이 실려 있다. 그리고 고려 후기 천태종 승려인 진정국사 천책이 연곡사를 주1 서술하였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고려 후기에는 연곡사가 천태종 소속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연곡사에 대한 기록으로 몇 편의 시가 남아 있다. 양대박(15431592)의 「연곡 동암의 관 스님을 추억하며〔燕谷東庵 憶觀師〕」, 이순인(15331592)의 「연곡사」 등이다. 그리고 부용 영관(14851571)의 승탑을 세웠다. 부용 영관은 조선 후기 청허계의 조사인 청허 휴정(15201604)과 부휴계의 조사인 부휴 선수(1543~1615)의 스승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지리산 일대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왜군에게 유린되었다. 1597년 8월 왜군이 구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왕의성 부대 의병들이 연곡 일대에서 저항했으므로 연곡사도 전쟁으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소한(15981645)의 「태능 노선사가 내가 산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연곡사로부터 와서 성 스님과 현묘함을 담론하였는데 듣고 기쁜 마음에〔太能老師聞余入山 自燕谷寺來 會與性師談玄 聽而志喜〕」라는 시가 전하고, 또 연곡사에는 청허 휴정의 제자로서 4대 문파 가운데 소요문파의 조사인 소요 태능(15621649)의 승탑이 있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정유재란 이후 연곡사는 곧바로 중창되었던 것 같다. 당시 중관 해안(1567~?)은 연곡사를 방문하여 남긴 「제연곡사회(題燕谷寺會)」라는 시에서 계율과 주2의 승려들이 머무는 곳이라고 하였다.
1655년(효종 6)에는 『석가여래성도기주(釋迦如來成道記註)』가 연곡사에서 간행되었다. 1686년(숙종 12) 7월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따르면, 사찰이 웅장하고 화려하며 영자전(靈子殿)에는 진각국사 이하 10여 명의 진영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조선 후기 여러 문인들과 승려들이 쓴 기행문이나 시에서 연곡사를 언급하고 있다.
1745년(영조 21)에는 조정에서 연곡사 일대의 밤나무를 율목봉산(栗木封山)으로 지정하고 연곡사에서 관리하도록 하였다. 율목봉산은 신주와 신주를 담는 궤짝을 만들 밤나무를 관리하고 외부인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던 산이다. 1779년(정조 3)에는 동파 정심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연곡사가 폐사되었다’고 하였지만, 1802년(순조 2)에 연곡사를 내수사(內需司)의 속사로서 백지(白紙)를 납품하도록 하였으며, 1859년 3월 25일에 영의정 정원용이 율목봉산의 연곡사가 수재(水災)에 무너졌으므로 주3 150장과 승첩 50장을 발급하여 수리할 것을 건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07년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이 당시 광양만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정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연곡사로 집결시켰다. 이때 그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에 의하여 고광순과 의병들은 모두 순절하였고 절은 불태워졌다. 그 뒤 1942년에 다시 중건을 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가 된 뒤로 사찰 주4와 교통 사정 때문에 재흥을 보지 못하다가 1965년에는 소규모의 대웅전이 주5를 겸하여 세워졌고, 1981년에 새로 대웅전을 준공하였다. 이어서 1983년에 대적광전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94년에 요사를 증축하였다. 1995년에는 일주문을 세웠고, 1996년에는 종각과 수각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연곡사에는 국가문화유산 국보 2점과 보물 4점이 있다. 국보는 북 승탑과 동 승탑이고, 보물은 삼층석탑, 동 승탑비, 현각선사탑비, 소요대사탑이다. 삼층석탑은 연곡사 창건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북 승탑, 동 승탑, 동 승탑비, 현각선사탑비는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본다. 소요대사탑은 탑신의 기록을 통해 1650년(효종 원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동 승탑은 일제가 도쿄대로 옮겨 가기 위하여 수개월 동안 연구하였지만, 산길로는 운반이 불가능하였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삼층석탑을 1967년 해체, 보수할 때에 하층 기단부에서 높이 23.5㎝, 어깨너비 4.5㎝의 동조 여래입상(銅造如來立像) 1구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