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종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전기 고려의 제7대 왕.
이칭
성명
왕송(王誦)
시호
선녕(宣寧), 선양(宣讓)
효신(孝伸)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980년(경종 5)
사망 연도
1009년(목종 12)
본관
개성(開城)
출생지
개경
주요 관직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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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목종은 고려 전기 고려의 제7대 왕이다. 17세에 즉위하여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였다. 또한 과거시행법을 정비하였으며, 서경(西京)을 중시하였다. 하지만 천추태후(天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의 영향력을 제어하지 못하였다. 김치양의 난으로 대량원군(大良院君)을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강조(康兆)에게 입위를 명령하였지만, 오히려 강조에게 시해되었다.

정의
고려 전기 고려의 제7대 왕.
가계 및 인적 사항

이름은 왕송(王誦),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효신(孝伸)이다. 경종의 큰아들이며, 어머니는 헌애왕후(獻哀王后)〔천추전에서 머물러서 천추태후(千秋太后)라고 불린다〕 황보씨(皇甫氏)이다.

주요 활동

경종이 죽었을 때 겨우 2세여서 당숙인 성종이 왕이 되었다. 이후 성종은 목종을 궁중에서 양육하였고, 990년(성종 9) 개령군(開寧君)으로 책봉하였다. 이후 7년 만인 17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목종은 성품이 침착하고 굳세며 임금의 도량이 있었다.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 술을 즐기며 사냥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정치에 뜻이 없었으며, 측근만을 가까이하였다는 유교적 평가를 받았다.

즉위 첫해 12월에 문무양반 및 군인전시과(軍人田柴科)를 개정하였다. 이 개정은 성종대 관직 제도의 정비에 부응하여, 전지(田地)와 시지(柴地)를 받는 대상을 18과로 나누어 차등하여 지급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또한 문관이 무관에 비해 우월한 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1004년(목종 7) 과거시행법을 정비하여, 3월에 3일 동안 시험을 보고 1주일 후에 합격자를 발표하는 방식으로 변경하였다. 재위(997~1009) 기간에 총 네 차례에 걸쳐 서경에 행차하였으며, 지방 순행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1003년 개경, 서경, 동경과 10도의 학생 가운데 천거를 받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서경을 중시하고 지역세력과 관계를 가지며, 이를 등용하려 노력하였다. 또한 북방 지역인 함경남도 안변(安邊), 평안북도 귀성(龜城), 함경남도 정평(定平) 등에 성을 쌓아 여진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인 천추태후와 김치양(金致陽) 등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어하지 못하였다.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후사가 없던 목종의 뒤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천추태후는 태조의 손자로 왕위 계승이 가능한 대량원군(大良院君)을 강제로 승려로 만들고, 국왕의 원찰(願刹)인 숭경사(崇敬寺)에 보냈다. 이후 삼각산 신혈사(神穴寺)에 거처하는 대량원군을 여러 차례 살해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1009년(목종 12) 정월 대부(大府)의 기름창고에서 화재가 나서 천추전에 옮겨붙어 불타버렸다. 목종은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병이 났다. 그는 김치양의 모의를 알고, 재신(宰臣) 최항(崔沆) · 채충순(蔡忠順) 등에게 대량원군을 자신의 후사로 영립(迎立)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에게 입위(入衛)를 명하였다. 강조는 무장병력을 이끌고 개경으로 들어와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렸는데, 현종이다.

또한, 강조는 김치양과 아들, 유행간 등 7명을 죽이고 천추태후의 세력 등과 함께 유배를 보냈다. 목종은 강조에게 폐위를 당한 후에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로 향하다가 파주시 적성(積城)에서 강조가 보낸 사람들에게 시해되었다.

상훈과 추모

목종 사후 선녕(宣寧) · 선양(宣讓)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김창현, 『천추태후 역사 그대로』(푸른역사, 2009)

논문

김보광, 「고려 목종대 정치세력과 정국동향」(『역사와 현실』 91, 한국역사연구회, 2014)
권순형, 「고려 목종대 헌애왕태후의 섭정에 대한 고찰」(『사학연구』 89, 한국사학회, 2008)
김당택, 「고려 목종 12년의 정변에 대한 일고-목종 대의 사경발문과 관련하여」(『한국학보』 18, 일지사, 1980)
이태진, 「김치양난의 성격」(『한국사연구』 17, 한국사연구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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