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서(蔭敍)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처음에 금주(金州: 경상남도 김해시) 판관(判官)으로 나가, 이 지역의 농업을 장려하고 농민들의 요역(徭役) 부담을 줄여주었다. 7년 후 영송도감녹사(迎送都監錄事)가 되었다가, 인종이 발탁하여 내시(內侍)로 임명하였다. 이후 개성부(開城府) 수령으로 나갔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가 되었다.
1135년(인종 13)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을 진압할 부대의 전군병마판관(前軍兵馬判官)이 되었다. 그는 이유(李愈), 이영장(李永章)과 함께 2,000명을 거느리고 진군하다가, 적진에서 화살을 맞았다. 개선한 후에 시전중내급사(試殿中內給事)가 되었다. 이후 도관형부원외랑(都官刑部員外郞)으로 삼사판관(三司判官)을 겸직하였다.
1138년(인종 16) 인종 생일에 금(金)이 보내온 사절에 대한 답례로 사신이 되어 금에 파견되었다. 금에서 돌아온 이후 선군사(選軍使), 즉 군인 선발 등의 행정을 처리하는 일로 공주(公州), 홍주(洪州) 지역의 사졸(士卒)을 검열하였다. 이때 1140년(인종 18) 상주목부사(尙州牧副使)가 되어 재판과 행정을 잘 처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상서우승(尙書右丞)이 되었다. 1152년(의종 6) 나이 70세가 되어 은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