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돈시가 어릴 적에 한 승려를 따라 당상관(唐商館)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아내와 사이가 나빴던 어느 상인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사람의 집으로 가려고 하였다. 당시는 겨울이었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김돈시는 이 상황에 빗대어 시를 지었는데, 그의 시를 본 상인이 깨우침을 얻고, 결국 아내를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1165년(의종 19) 김돈시는 대제(待制)의 관직에 있었는데, 아버지 김부식이 지은 관란사(觀瀾寺)를 형 김돈중과 같이 수리하였다. 김돈시는 의종에게 관란사가 복을 비는 곳이라고 아뢰었다. 의종이 관란사로 행차하려는데, 사찰의 북쪽 산이 민둥산이어서 보기 흉하였다. 김돈시는 김돈중 등과 함께 인근의 백성을 모아 소나무 등의 각종 나무와 기이한 화초를 심고 괴석으로 꾸몄다. 또한, 단(壇)을 쌓아 국왕의 방을 만들고 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김돈시는 형 김돈중과 함께 관란사의 서쪽 대에서 잔치를 크게 열었는데, 이때 쓰인 휘장과 그릇, 진귀한 음식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1166년(의종 20) 의종은 개경 성북동에 있는 김돈시의 집을 별궁으로 삼아서 이곳으로 옮겼다. 이는 김돈시가 의종의 측근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는 1169년(의종 23) 과거시험을 주관하여 임정(林廷) 등을 선발하였다. 1170년(의종 24) 무신 정중부(鄭仲夫) 등이 일으킨 난에서 다른 문신 50여 명과 같이 살해되었다. 무신들은 김부식의 아들인 김돈시와 김돈중을 중요한 살해 대상으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