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류(金子鏐)는 신라 왕의 후손이며, 경주(慶州)에서 호장(戶長)을 오랫동안 지내온 토착 세력 출신이다. 아버지는 김관(金琯)이며, 어머니 이씨(李氏)는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다. 부인 최씨는 최항(崔沆)의 손녀로 낙랑군대군(樂浪郡大君)에 봉해졌으며 1남 1녀를 두었다.
김자류는 경주에서 개경으로 유학을 간 후에 과거 시험에 입격하였다. 이후 삼척현위(三陟縣尉)에 임명되었다가 돌아와 국왕의 내시(內侍)가 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출신지인 동경유수판관(東京留守判官)이 되었다. 예종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郞)에 제수한 후에 다시 불러들여 시어사(侍御史) 겸 비서소감(秘書少監)으로 삼았다. 하지만 또다시 지방의 방어사(防禦使)로 좌천되었다가 소환되어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1126년(인종 4) 위위경(衛尉卿)이 되어 형부낭중(刑部郎中) 유덕문(柳德文)과 함께 중국 금(金)나라가 고려의 보주성(保州城: 지금의 평안북도 신의주 일대)에 대한 점유권을 인정한 데 대한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다. 앞서 금의 사신 고백숙(高伯淑)은 고려에 와서 보주성 지역을 고려 영토로 인정하고, 이곳을 다시 수복하지 않겠다는 금 황제의 문서를 가져왔다. 보주성 지역은 이전에 요(遼)가 고려로부터 빼앗았던 곳인데, 당시 고려가 이를 되찾았다.
김자류가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사신단 수행원 숭길(崇吉)이 금나라 사람을 찔러 죽이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책임으로 좌천되어 지남원부(知南原府)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이후 태부소경 삼사부사 병부시랑(大府少卿 三司副使 兵部侍郞)이 되었다.
1126년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탔는데, 김자류는 중수도감부사(重修都監副使)가 되어 기술자를 이끌어 토목공사를 지휘하였다. 이로 인해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가 되었다. 만년에 불교를 열심히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