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양은 경종이 죽은 후에 승려 행세를 하면서 천추궁(千秋宮)에 출입하며 천추태후와 추문을 일으켰는데, 성종은 즉위하자 김치양을 유배 보냈다. 다만 그가 실제 화엄종 승려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목종이 즉위한 이후 천추태후는 실권을 장악하고 김치양을 합문지후 통사사인에 임명하였다. 이후 국왕의 측근이면서 재정을 맡은 우복야 겸 삼사사(右僕射兼三司使)가 되어 관료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행사하였다. 그는 자신의 세력을 조정에 심었는데, 유행간(庾行間)과 이주정(李周禎) 등을 그의 정치세력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친당(親黨)이 아닌 단지 협조하는 관계였다고 보기도 한다.
김치양은 고려 초 이래 성장한 서경 세력에 속한다고 여겨진다. 그는 목종에게 네 차례나 서경 행차를 하게 하였으며, 그때마다 방악(方嶽)과 주진(州鎭)의 신기(神祇)에 대한 재제(齋祭) 의식을 갖게 하였다. 이 조치는 성종대에 있었던 산천(山川)에 대한 제사 삭감을 다시 복구한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출신지인 서흥(瑞興)에 성수사(星宿寺)라는 사당을 지었고, 궁성 서북쪽에 시왕사(十王寺)를 세웠는데, 도교 · 불교 및 토속신앙에 바탕을 둔 곳이다.
1003년(목종 6)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당시 왕위계승에 가장 유력한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 후의 현종)을 승려로 만들어 숭경사(崇敬寺)에 보냈다. 이후 왕순을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긴 후에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 암살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김치양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아들의 왕위계승을 위해 친거란 정책을 주도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1009년(목종 12) 천추궁 옆에 대부(大府)의 기름창고에서 화재가 일어나 천추전이 불탔다. 이 화재는 김치양이 대량원군을 추대하려는 반대 세력을 축출하려는 의도로 저지른 것이라는 견해와 함께, 오히려 반대 세력인 유진(劉瑨) · 채충순(蔡忠順) · 최항(崔沆) · 강조(康兆) 등이 김치양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화재에 큰 충격을 받아 병이 난 목종이 정무를 보지 않자 김치양은 반란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이 계획은 유충정(劉忠正)의 밀고로 드러났다. 목종은 최항 · 채충순 ·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에게 신혈사에서 대량원군을 맞아들이게 하였고,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康兆)에게 군사를 이끌고 입위(入衛)할 것을 지시하였다. 강조는 무장병력을 이끌고 김치양과 그의 아들을 죽이고, 목종을 폐위한 후에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