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성종 때 여철(如哲)이 창건하였다. 이 절은 현종이 즉위하기 전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있을 때 목숨을 구한 사찰로 유명하다.
고려 제5대 경종의 비였던 천추태후(千秋太后)는 제7대 목종에게 후사가 없음을 기화로 하여 김치양(金致陽)과 짜고 왕위계승자인 대량원군을 죽이려고 하였다.
태후는 대량원군을 없애고 자기가 낳은 사생아를 키워 임금으로 삼으려는 심산이었다. 태후는 목종에게 말하여 대량원군을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게 하고 죽일 틈을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신혈사로 옮기게 하였다.
당시 신혈사는 진관조사(津寬祖師) 혼자서 조용히 수도하고 있던 작은 암자였으므로 죽이기가 쉬울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진관조사가 먼저 이를 간파하고 방 밑으로 지하굴을 파고 그 위에 침상을 놓아서 12세의 대량원군을 숨겼으므로 왕태후가 보낸 자객은 대량원군을 찾지 못하였다.
이곳에서 3년을 보낸 뒤 목종이 죽자 송도로 돌아와서 대량원군은 제8대 현종이 되었으며,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 절을 중창하였다.
그 뒤 1090년(선종 7) 10월에 왕은 이 절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베풀었고, 1099년(숙종 4) 윤9월과 1110년(예종 5) 10월에도 왕이 이 절에 행차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 및 폐사연대는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