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는 태조 왕건의 손녀로, 아버지는 왕욱[王旭, 대종(戴宗)], 어머니는 선의왕후(宣義王后)이다. 부모가 모두 태조의 자녀로 이복 남매간에 혼인하였다. 태후는 사촌인 경종과 혼인하여 동성혼을 피하고자 할머니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의 성씨를 따 황주 황보씨(黃州 皇甫氏)를 칭하였다.
태후는 혼인 뒤 숭덕궁에 거처하며 목종을 낳았다. 남편이 젊은 나이로 사망해 18세에 청상과부가 되자 외족인 김치양(金致陽)과 사통했다. 오라버니 성종의 뒤를 이어 아들 목종이 나이 18세로 즉위하자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는 존호를 받고 섭정을 했는데, 천추전에 거처했기 때문에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불렸다. 왕이 성인인데도 모후가 섭정한 보기 드문 사례이다.
천추태후는 성종에 의해 유배되었던 연인 김치양을 불러들여 총애하며 함께 권력을 행사했다. 천추태후의 원찰로 개경에 화엄 진관사가 창건되었고, 그 안에 9층탑이 건립되었다. 태후는 김치양과 함께 1006년(목종 9)에 대장경을 금자(金字)로 사경(寫經)했는데, 그 일부인 『대보적경(大寶積經)』이 남아 있다. 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목종의 후계자로 만들려 하면서 조카인 대량원군(大良院君, 뒤의 현종)과 갈등했다. 사서에 의하면 대량원군을 꺼려 승려로 만들고, 누차 해를 끼치려 했다고 한다.
1009년(목종 12)에 천추전이 불타면서 정변이 발생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김치양이 난을 일으킨 것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수주(水州, 수원) 출신 최사위(崔士威)를 중심으로 한 대량원군 세력이 정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정변의 진행 중에 강조(康兆)가 서북면에서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진입해 권력을 장악하여 현종을 왕으로 옹립했다. 김치양은 죽임을 당했고, 목종은 폐위당해 유배 중에 시해당했다. 천추태후는 할머니의 고향인 황주로 추방되었다. 태후는 황주에 21년 동안 머물다가 병이 들자 개경으로 돌아왔다. 1029년(현종 20) 정월에 숭덕궁(崇德宮)에서 66세로 사망했으며, 유릉(幽陵)에 묻혔다.
시호는 ‘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