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방(敎坊)은 이원(梨園), 선방(仙坊), 법부(法部)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궁중기구로 창설되어 오랫동안 유지되면서 속악을 익히는 한편 속악의 공연을 주도해 고려 음악의 형성과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조선 초기에 관습도감(慣習都監)에 흡수되면서 독립성을 상실하지만 창기의 속악 연주는 계승된다.
고려시대 교방은 대악서(大樂署), 관현방(管絃房)과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음악기구였다. 교방은 중국의 당나라가 설치했고 송나라가 이어받았는데 고려는 송으로부터 교방을 도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현종이 정변을 통해 목종을 몰아내 즉위하자 교방을 폐지했지만 교방은 곧 다시 설치되었다. 고려 문종 때에는 송의 음악을 왕성하게 수용했다. 특히 교방의 창기들이 송의 속악을 집중적으로 익혔으며, 그 결과 1076년(문종 30)에 관현방이 설치되었다. 1076년(문종 30) 이전에는 대악서와 교방이 음악을 담당했고, 그 이후에는 관현방이 추가되었다.
고려의 교방은 한편으로는 속악을 교습하고 공연했으며, 한편으로는 대악서와 관현방에 숙련된 창기를 공급했다. 교방의 창기는 대개 전국의 창기 중에서 선발되었고, 때로는 관비(官婢)와 궁녀에서 뽑히기도 했는데 천시되었다. 고려시대는 속악이 아악보다 유행했는데, 그러한 흐름의 중심에 교방과 그 소속 창기가 있었다. 고려에서 아악은 제례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반면 속악인 당악과 향악은 조회, 조하(朝賀), 각종 경축행사, 왕의 행차, 왕의 환궁, 각종 연회에서 활발하게 연주되었다. 이러한 속악 연주의 담당자는 교방 혹은 양부(兩部) 등으로 나타나는데 그 주체는 창기였다. 고려 음악의 특색은 속악과 여악(女樂)에 있었으며 그 중심에 교방이 놓여 있었으니 고려음악의 발전은 교방과 창기에 의해 주도되었다.
교방은 조선 초기에 관습도감에 편입되면서 독립성을 상실했지만 창기들은 속악의 맥을 이어갔다. 조선 관습도감은 악학도감(樂學都監)을 거쳐 장악서(掌樂署) 내지 장악원(掌樂院)에 통합되며 장악원은 대한제국 때 교방사(敎坊司)로 개칭된다.
교방은 우리나라 속악의 보존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