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철(金光轍)은 17세에 과거에 급제해 부친 김태현을 따라 원에 들어가 천수성절(天壽聖節)을 축하하였다. 문음(門廕)으로 판관에 임명되었고, 감찰규정(監察糾正), 검교전객승(檢校典客丞), 정언(正言) 지제교(知製敎), 헌납(獻納), 양광도 안렴사를 지냈다. 집정(執政)을 거슬려 또 지방으로 나가 선주(善州) 수령과 복주(福州) 판관을 거쳐 개성 소윤(開城少尹)에 임명되었다. 전리 총랑(典理摠郞), 성균 좨주(成均祭酒) 지전법사(知典法事)를 거쳐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
1344년(충목왕 즉위) 6월에 서연(書筵)을 설치했을 때 지신사로서 서연관에 참여했다. 이후 판도 판서(版啚判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밀직사의 동지사), 상호군(上護軍), 화평군(化平君),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밀직사의 판사), 우문관 제학(右文館提學),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랐다. 1347년(충목왕 3) 2월에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었을 때 판밀직사사로서 정치도감 판사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이해 10월에 원이 기황후의 친족 기삼만(奇三萬)의 사망으로 인해 직성 사인(直省舍人) 승가노(僧家奴)를 파견해 정치관(整治官) 백문보(白文寶) 등에게 곤장을 쳤다. 안축(安軸)과 왕후(王煦)는 성지(聖旨)로 용서하였고, 김광철과 전 대호군(大護軍) 이원구(李元具)는 질병으로 인해 곤장을 면제받았다. 1349년(충정왕 1) 6월 병자일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민(文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