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원래 이름은 권재(權載), 몽골명은 탈환(脫歡)이다. 아버지는 정승 권보(權溥)이다.
충선왕(忠宣王)의 신임을 받은 형 권준(權準)의 도움으로 낭장(郎將)에 오르고, 다시 삼사판관(三司判官)으로 전임되었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불려가 아들로 입적되면서 왕후(王煦)라는 이름이 하사되었다. 1308년 7월 충렬왕(忠烈王)이 죽자 8월 충선왕과 함께 돌아와 상을 치렀다. 1313년(충선왕 5) 여름 임금을 따라 본국으로 돌아온 이후 사복부정(司僕副正)을 거쳐 사헌집의(司憲執義)에 제수되었다. 1314년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1316년(충숙왕 3) 4월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또 봉해지자 사람들이 왕의 아우라 칭하였다.
1314년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원나라에 들어가 있던 충선왕의 요청으로 다시 원나라에 가서 황태자의 시그루치[速古赤: 시자]가 되고 계림군공(鷄林君公)의 작위와 전택을 받았다. 1320년 충선왕이 원나라 환관 빠앤투구스[伯顔禿古思]의 모함으로 티베트(西藏) 지방으로 귀양가게 되었을 때 충선왕을 대신하여 가겠다고 청원해 원제(元帝)를 감동시켰다. 문객 세 명을 데리고 티베트에 가서 충선왕을 만났으며 마침 용서한다는 황제의 명령이 내려지자 충선왕을 호위하여 연경(燕京)으로 돌아왔다.
1325년 5월 충선왕이 죽자 최마복(衰麻服)을 입은 채 영구를 모시고 고려로 돌아와 장사지내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능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 1342년(충혜 복위 3) 2월에는 죽은 지 20여 년이 지나도록 충선왕의 시호가 없자 원나라에 직접 가 시호를 청하고 아울러 충숙왕의 시호도 함께 받아 돌아왔다.
1344년(충목왕 즉위) 3월에는 성절사(聖節使: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같은 해 10월 우정승에 임명되었고, 같은 달 정방(政房)이 혁파되어 문반과 무반의 전선(銓選)을 전리사와 군부사가 각각 관장하였을 때 그는 우정승 판전리사사로 문반의 전주를 담당하였다. 12월 권세가에게 소속된 녹과전(祿科田)을 원상태로 회복하려고 시도하다 도리어 권문세가(權門勢家)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다음 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인사권을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에 각각 귀속시켰다.
1346년(충목왕 2) 입조하라는 순제(順帝)의 명에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좌정승 김영돈(金永旽)과 함께 황제의 교지를 가지고 돌아왔다. 다음 해 2월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여 김영돈 및 찬성사 안축(安軸), 판밀직(判密直) 김광철(金光轍)과 함께 판사(判事)가 되어 33인의 속관(屬官)으로 하여금 각 도의 토지를 측량케 하였다. 이때 기황후(奇皇后)의 친척인 기삼만(奇三萬)이 남의 토지를 빼앗는 등 기세등등하게 불법을 자행하자 정치도감의 다른 관원과 함께 붙잡아 곤장을 때리고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죽였다.
기삼만의 죽음으로 정동행성(征東行省) 이문소(理問所)가 저항의 전면에 나서 개혁에 차질을 빚게 되자 그는 다시 한번 원의 지원을 받아 개혁활동을 지속시키고자 하였지만, 원이 이문소의 입장을 받아들여 정치관을 신문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정치관 16명이 장형에 처해짐으로써 정치도감의 활동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다.
같은 해 3월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12월 충목왕(忠穆王)이 죽자 덕녕공주(德寧公主)의 명령으로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 기철(奇轍)과 함께 정동성(征東省)의 일을 섭행하면서 이제현(李齊賢)을 원나라에 보내 공민왕과 충정왕 중에서 왕을 선택하여 달라는 표문을 올렸다. 1349년(충정 1) 3월 원나라에 가서 성절을 축하하고 돌아오던 중 7월 창의현(昌義縣)에 이르러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정헌(正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