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녕공주(德寧公主)는 충혜왕의 왕비이자 제29대 충목왕의 모후이다. 이름은 이린진발(Irinjinbal, 亦憐眞班)이며, 진서무정왕 초팔(焦八)의 딸이다. 충목왕과 충정왕 초반에 섭정으로 고려의 정치를 주관하였다.
생년은 미상이며, 아버지 초팔은 쿠빌라이 제7자 오크룩치(奧魯赤)의 아들인 테무르 부카(鐵木兒不花)의 둘째아들 샤스가바(搠思班)이다. 샤스가바는 1329년에는 사천(四川)에서, 1330년에는 운남(雲南)에서 반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는데, 1331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덕녕공주의 남자형제로는 당올반(党兀班)과 팔적마적가(八的麻的加)가 있다.
1330년(충숙왕 17) 3월에 원나라에서 충혜왕과 혼인하고 7월에 고려에 왔다. 충목왕과 장녕옹주(長寧翁主)를 낳았다. 아들 충목왕이 즉위하자 섭정하였으며, 이후 충목왕의 이복제 충정왕이 즉위하였을 때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350년(충정왕 2)에 원나라로 갔다가 4년 후인 1354년(공민왕 3년)에 다시 고려로 귀환하였다. 이후 노왕(魯王)에게 시집갔다 실종되었던 장녕옹주가 귀국하니 함께 여생을 보냈다. 1375년(우왕 1)에 사망하였다.
충혜왕과 13년간 부부의 인연을 맺었는데, 충혜왕의 지나친 여성편력으로 인해 혼인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충혜왕은 관료의 아내 뿐 아니라 서모(庶母)인 수비(壽妃) 권씨와 경화공주(慶華公主)까지 간음하였다. 특히 경화공주 간음사건은 충혜왕을 폐위하고 심왕을 옹립하려는 조적(曹頔)의 난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덕녕공주는 남편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았고, 다른 원 공주들과는 달리 고려인 왕비와의 갈등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아들이 어린 상황에서 남편의 건재, 남편과의 공조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343년(충혜왕 후4) 충혜왕이 폐위되자 덕녕공주의 역할에는 큰 변화가 생겨났다. 1344년 아들인 충목왕이 8세의 나이로 즉위하니 덕녕공주는 섭정이 되어 고려의 정사를 좌지우지하였다. 이 때 측근으로 두드러진 역할을 한 인물이 신예(辛裔)・강윤충(康允忠)・배전(裴佺)이었다. 신예는 오랜 동안 정방(政房)에 있으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신왕(辛王)이라 불릴 정도였으며, 강윤충에게는 충목왕대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개혁을 그르쳤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아울러 강윤충과 배전은 궁궐에 출입하면서 젊은 덕녕공주에게 총애를 받았다는 비난도 있었다.
충목왕이 재위 4년 만에 죽자 덕녕공주는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 기철과 정승 왕후(王煦)에게 명하여 정동행성의 일을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그리고 충혜왕의 희비(禧妃) 윤씨 소생인 충정왕이 즉위한 이후에도 섭정의 자격으로 정사를 보았다. 그러나 엄연히 왕의 모후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덕녕공주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덕녕공주는 1350년(충정왕 2)에 원나라로 떠나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1367년(공민왕 16)에 원나라로부터 정순숙의공주(貞順淑儀公主)로 책봉되었다. 묘호는 경릉(頃陵)이며, 1377(우왕 3)에 충혜왕의 진전(眞殿)에 부묘(祔廟)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