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덕녕공주는 고려 후기 제28대 충혜왕의 왕비이다. 이름은 이린진발이며, 진서무정왕 초팔의 딸이다. 1330년 충혜왕과 혼인하여 충목왕과 장녕옹주를 낳았다. 충혜왕의 여성 편력으로 혼인 생활이 평탄하지 않았다. 1343년 충혜왕이 폐위되고 충목왕이 8세의 나이에 즉위하자 섭정하게 되었다. 충목왕이 죽고 충혜왕의 희비 윤씨 소생의 충정왕이 즉위한 이후 섭정의 자격으로 정사를 보았으나 점차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1350년 원나라로 갔다가 1354년 고려로 귀환하여 장녕옹주와 함께 여생을 보내다가 1375년에 사망하였다.
정의
고려후기 제28대 충혜왕의 왕비.
개설
생애
1330년(충숙왕 17) 3월에 원나라에서 충혜왕과 혼인하고 7월에 고려에 왔다. 충목왕과 장녕옹주(長寧翁主)를 낳았다. 아들 충목왕이 즉위하자 섭정하였으며, 이후 충목왕의 이복제 충정왕이 즉위하였을 때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350년(충정왕 2)에 원나라로 갔다가 4년 후인 1354년(공민왕 3)에 다시 고려로 귀환하였다. 이후 노왕(魯王)에게 시집갔다 실종되었던 장녕옹주가 귀국하니 함께 여생을 보냈다. 1375년(우왕 1)에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1343년(충혜왕 후4) 충혜왕이 폐위되자 덕녕공주의 역할에는 큰 변화가 생겨났다. 1344년 아들인 충목왕이 8세의 나이로 즉위하니 덕녕공주는 섭정이 되어 고려의 정사를 좌지우지하였다. 이 때 측근으로 두드러진 역할을 한 인물이 신예(辛裔)・강윤충(康允忠)・배전(裴佺)이었다. 신예는 오랜 동안 정방(政房)에 있으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신왕(辛王)이라 불릴 정도였으며, 강윤충에게는 충목왕대 [정치도감(整治都監)]](E0051030)의 개혁을 그르쳤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아울러 강윤충과 배전은 궁궐에 출입하면서 젊은 덕녕공주에게 총애를 받았다는 비난도 있었다.
충목왕이 재위 4년 만에 죽자 덕녕공주는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 기철과 정승 왕후(王煦)에게 명하여 정동행성의 일을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그리고 충혜왕의 희비(禧妃) 윤씨 소생인 충정왕이 즉위한 이후에도 섭정의 자격으로 정사를 보았다. 그러나 엄연히 왕의 모후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덕녕공주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덕녕공주는 1350년(충정왕 2)에 원나라로 떠나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元史』
- 『新元史』
- 『고려시대의 후비(后妃)』(정용숙, 민음사, 1992)
- 「충혜왕비 덕녕공주의 정치적 역할과 위상」(김난옥, 『한국인물사연구』 14, 한국인물사연구회, 2010)
- 「고려·원 왕실통혼의 정치적 의미」(이명미, 『한국사론』 49, 서울대 국사학과, 2003)
- 「여원(麗元) 왕실통혼의 성립과 특징: 원 공주 출신왕비의 가계(家系)를 중심으로-」(김혜원, 『이대사원』 24·25 합집, 이대 사학회, 1990)
- 「元麗關係中的王室婚姻與强權政治」(蕭啓慶, 『元代史新探』, 新文豊出版公司,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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