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전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 향사하는 처소이다. 진전이 제도화되어 나타난 것은 고려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역대 군왕을 경령전에 봉안하거나 왕·후비의 진영을 원찰에 봉안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 진전의 의미가 더욱 두드러진다. 이 시대에는 한편으로는 태조만을, 한편으로는 열조를 받드는 진전이 있었다. 조선왕조 끝 무렵 진전에는 선원전, 영희전, 준원전, 경기전, 목청전 등이 있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에는 전주 경기전만 남아 있다. 진전은 왕조의 위엄을 통해 국가의 존재를 의식하도록 하기 위한 사회적 산물이다.
진전에 관한 기록은 이미 『삼국사기』 궁예조의 ‘부석사신라왕상(浮石寺新羅王像)’이라든지 『창암집』의 ‘원주경순왕영전(原州敬順王影殿)’ 등에서 단편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전이 제도화되어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이다. 이 시대의 진전 체제를 개괄해 보면 대략 2가지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역대군왕의 초상을 봉안하기 위한 진전이었다. 도성 내의 경령전(景靈殿) 설치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또 하나는 도처(개성 부근)에 각 왕마다 원찰(願刹)을 두고 이곳에다가 왕 및 후비의 진영을 봉안하기 위한 진전을 부설하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고려시대 진전 설립의 구체적인 방식은 대체로 중국 송나라 때의 진전 체제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경령전은 송대에 경령궁(景靈宮)을 설치하여 왕 및 후비의 진영을 봉안하였던 제도를 본뜬 것으로 여겨진다.
차이점이 있다면 고려는 제후(諸侯)의 나라로 자처하였기 때문에 『예기』 왕제편에 보이는 “제후왕묘는 이소와 이목, 그리고 태조의 묘를 합해 다섯이다(諸侯王廟 二昭二穆與太祖之廟而五)”라는 구절에 준하여 경령전 내에 5실을 두고 받들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태조는 백세불천(百世不遷)이지만 그 밖의 4실은 순환식으로 역대군왕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원찰의 형식 역시 송대의 신어전(神御殿) 실시와 유사한 성격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진전 제도는 대체로 송대의 것을 모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단지 규모의 대소에서 빚어지는 차이와 함께 고려시대 전반에 팽배하였던 숭불관념으로 인하여 선왕수용(先王睟容)은 사원부설영전에서 봉안되었다. 송대의 신어전처럼 도관(道觀)이나 별궁(別宮)에서의 진영 봉안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차이점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진전의 존재 및 그 의미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시대의 진전 체제는 한편에서는 국조(國祖)인 태조의 수용만을 받드는 진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열조(列朝)의 수용을 받드는 진전을 설치하였다.
태조진전은 서울의 문소전(文昭殿)을 비롯하여 외방 5처, 즉 경주 집경전(集慶殿), 전주 경기전(慶基殿), 평양 영숭전(永崇殿), 개성 목청전(穆淸殿), 영흥 준원전(濬源殿)을 두었다. 이곳들은 모두 태조와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태조진전 분립 방식은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원묘를 경사(京師) 및 군국(郡國)에 분립하였던 제도를 본뜬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 내에는 선원전(璿源殿)을 두어 선왕선후의 진영을 함께 봉안하였다. 이 밖에 세조진영은 세조가 죽은 뒤 양주 정릉(正陵) 곁 봉선사(奉先寺) 동쪽에 봉선전(奉先殿)을 짓고 여기에 봉안함으로써 고려시대 진전 제도의 유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전 체제 운영의 틀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크게 와해되었다. 난을 거친 뒤에 전우(殿宇)로는 개성의 목청전, 양주의 봉선전, 평양의 영숭전, 경주의 집경전 그리고 서울의 선원전이 폐기되었다. 영정으로는 목청전의 태조영정과 선원전의 열성어진이 모두 산일되었다. 따라서 임진왜란 후에는 영정의 이모, 수보 및 새로운 진전의 설치가 요구되었다. 여기서 남별전(南別殿 : 뒤의 永禧殿)이 등장하게 되고 강화에 새로운 집경전 · 영숭전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병자정축란이 일어나고 다시 진전 체제는 혼란을 겪게 된다. 이후 진전에서 받드는 영정은 준원전 · 경기전의 태조영정과 남별전에서 받들게 된 세조 및 원종영정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위축되어 버린 진전 체제로 인한 자각에서 숙종 연간에는 남별전을 증건하여 영희전이라 개칭하고 새로이 장녕전과 만녕전을 설치하여 숙종과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숙종이 죽은 뒤에는 창덕궁에 새로이 열성어진을 받드는 선원전을 설치하여 결국 영희전과 함께 각기 열성조어진(列聖朝御眞)을 받들게 되었다.
영 · 정조시대에는 어진도사 작업이 활발하여(영조 12본, 정조 7본), 이로써 선원전 · 영희전 · 장녕전 · 만녕전 같은 기존 진전만이 아니라 새로운 봉안 처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였던 당(堂)이나 궁(宮)에 어진을 봉안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즉, 태령전 · 육상궁 · 창의궁 · 경모궁 · 현륭원 · 경우궁 · 규장각 등이 그것이다.
그 뒤 고종 연간에 이르러 종친부 내에 천한전(天漢殿)을 세우고 철종어진을 일시 봉안하였다. 그러나 진전 체제의 변모를 가져온 선원전 실화(失火) 사건이 1900년에 발생한다. 이 불로 받들던 7조어진이 소실되며, 바로 증건 및 이모 사업을 벌이게 된다. 이 때에 태조어진을 1본 더 이모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폐기되었던 목청전을 증건하여 이곳에 봉안하게 된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의 끝 무렵에는 진전은 열성어진봉안처로서의 선원전 · 영희전 및 태조진전으로서의 준원전 · 경기전 · 목청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밖에 소규모의 봉안처가 있었다. 그러나 6 · 25사변을 거치면서 많이 소실되고, 현재는 남한에 경기전만이, 전주에 소재하여 있다.
진전이란 원래 단순히 어진을 봉안하는 처소로서 선조를 위한 효사추모(孝思追慕)의 전례에 기인하여 생겼다. 그러나 그 의의는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한 왕조의 진전은 그 왕조의 조종(祖宗)의 영구함을 꾀한 형식적 위엄과 질서 잡힌 체제를 통하여 국가라는 보다 큰 존재를 의식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하나의 사회적 제도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