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원전은 조선시대 국조인 태조의 어진(초상화)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외방 진전 중의 하나이다. 전주 경기전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며 조선 왕조의 뿌리를 재확인하는 기념 장소로 역할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조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향하는 진전을 서울에는 문소전(文昭殿) 한 곳, 외방에는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등 다섯 곳에 두고 유지하였다. 환조의 옛 집이자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곳에 세워진 준원전은 외방의 태조 진전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되었다. 태조의 태를 묻었던 용연(龍淵) 자리를 메우고, 태는 전라도 진산군 만인산(萬仞山)으로 옮긴 후 건립하였다. 1398년(태조 7) 왕의 어진을 함주의 준원전에 봉안하였고, 여러 산릉과 동일하게 1년 6차례 속절에 사신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418년(태종 18)에는 준원전직(濬源殿直) 2인을 두고 영전(影殿)을 관리하고 분향하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 서울의 문소전과 어진을 보관하던 선원전이 불타고, 외방 진전 중에서도 전주 경기전과 영흥 준원전의 태조 어진만이 보전되었다. 준원전 어진은 전의 수복들이 부의 서쪽에 있던 요덕산으로 옮겨 무사하였던 것이다. 1629년(인조 7) 준원전을 중수하였고, 1635년(인조 13)에는 판서 김상헌을 보내 준원전 어진을 모사한 후 화재로 소실된 경주 집경전의 어진을 대신하게 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영흥 유생 박효남이 말응도에 있던 뱃사공의 집으로 어진을 옮겨 보전되었다. 1641년(인조 19)에 다시 전우를 수리하고 환안하였다. 1731년(영조 7) 태조가 즉위하기 전 호적이라고 하는 문서가 발견되어 본전에 봉안하였다.
준원전은 외방의 태조 진전을 대표하는 곳이었지만, 제기를 도난당하는 등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837년에는 침입한 도둑이 봉안되어 있던 태조 어진을 조각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어진은 큰 조각 22개와 작은 조각 12개로 쪼개져 있었고, 익선관에서 옥대까지 상반신이 가장 큰 조각으로 남아 있었다. 조각을 맞춘 결과 오른쪽 어깨 부분을 제외하고 모든 부분이 남아 있어 신본으로 이모할 수 있는 상태였고, 바로 서울로 옮겨 이모하였다. 이모 작업의 주관 화사는 이재관(李在寬)이었다. 이모 후 신본을 다시 준원전에 펼쳐 봉안하고 구본 역시 봉안궤에 담아 준원전에 보관하였다.
1899년에는 영희전을 옮기고 경운궁 신선원전의 영정을 옮기면서 신선원전의 1실에 태조 어진을 새로 봉안하였다. 당시 태조 어진은 1872년에 이모한 전주 경기전본 및 서울 영희전본과 1837년 이모한 준원전본이 있었다. 신선원전에는 당시 남은 것 중 가장 오래된 이모본인 준원전본을 새로 모사한 후 봉안하였다. 경운궁 선원전에 봉안이 완료된 지 다섯 달도 채 안 되었을 때 화재가 발생하여 7실의 어진이 모두 불타 버리자 바로 새로 선원전을 건립하고 7실 어진을 모두 다시 그렸는데, 1실의 태조 어진은 1838년 준원전본을 이모하였다. 1907년 제향 장소를 일제히 정리하는 칙령이 반포되었는데 영희전과 장녕전, 화령전, 육상궁, 경우궁, 선희궁 평락전 등에 봉안된 어진을 창덕궁 내 선원전으로 옮기도록 한 내용이었다. 준원전은 전주의 경기전과 함께 그대로 유지되었다.
준원전은 조선시대 국조인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외방 진전 중의 하나이다. 전주 경기전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며 조선 왕조의 뿌리를 재확인하는 기념 장소로 역할하였다. 준원전의 역사와 제향 의례를 통해 조선시대 태조 어진이라는 왕조의 중요한 상징물에 대한 국가적 기념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준원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은 두 차례의 큰 전란 중에도 훼손되지 않고 보전되어, 이를 바탕으로 국초의 모습 그대로 태조 초상화를 다시 그리고 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