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시대 함경도 영흥에 있던 태조 진전(眞殿).
개설
내용
임진왜란 때 서울의 문소전과 어진을 보관하던 선원전이 불타고, 외방 진전 중에서도 전주 경기전과 영흥 준원전의 태조 어진만이 보전되었다. 준원전 어진은 전의 수복들이 부의 서쪽에 있던 요덕산으로 옮겨 무사하였던 것이다. 1629년(인조 7) 준원전을 중수하였고, 1635년(인조 13)에는 판서 김상헌을 보내 준원전 어진을 모사한 후 화재로 소실된 경주 집경전의 어진을 대신하게 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영흥 유생 박효남이 말응도에 있던 뱃사공의 집으로 어진을 옮겨 보전되었다. 1641년(인조 19)에 다시 전우를 수리하고 환안하였다. 1731년(영조 7) 태조가 즉위하기 전 호적이라고 하는 문서가 발견되어 본전에 봉안하였다.
준원전은 외방의 태조 진전을 대표하는 곳이었지만, 제기를 도난당하는 등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837년에는 침입한 도둑이 봉안되어 있던 태조 어진을 조각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어진은 큰 조각 22개와 작은 조각 12개로 쪼개져 있었고, 익선관에서 옥대까지 상반신이 가장 큰 조각으로 남아 있었다. 조각을 맞춘 결과 오른쪽 어깨 부분을 제외하고 모든 부분이 남아 있어 신본으로 이모할 수 있는 상태였고, 바로 서울로 옮겨 이모하였다. 이모 작업의 주관 화사는 이재관(李在寬)이었다. 이모 후 신본을 다시 준원전에 펼쳐 봉안하고 구본 역시 봉안궤에 담아 준원전에 보관하였다.
1899년에는 영희전을 옮기고 경운궁 신선원전의 영정을 옮기면서 신선원전의 1실에 태조 어진을 새로 봉안하였다. 당시 태조 어진은 1872년에 이모한 전주 경기전본 및 서울 영희전본과 1837년 이모한 준원전본이 있었다. 신선원전에는 당시 남은 것 중 가장 오래된 이모본인 준원전본을 새로 모사한 후 봉안하였다. 경운궁 선원전에 봉안이 완료된 지 다섯 달도 채 안 되었을 때 화재가 발생하여 7실의 어진이 모두 불타 버리자 바로 새로 선원전을 건립하고 7실 어진을 모두 다시 그렸는데, 1실의 태조 어진은 1838년 준원전본을 이모하였다. 1907년 제향 장소를 일제히 정리하는 칙령이 반포되었는데 영희전과 장녕전, 화령전, 육상궁, 경우궁, 선희궁 평락전 등에 봉안된 어진을 창덕궁 내 선원전으로 옮기도록 한 내용이었다. 준원전은 전주의 경기전과 함께 그대로 유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춘관통고(春官通考)』
-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模寫都監儀軌)』
- 「19세기 진전 및 어진 봉안처 운영에 대한 연구」(김지영, 『장서각』 26, 2011)
- 「숙종·영조대 어진 도사와 봉안 처소 확대에 대한 고찰」(김지영, 『규장각』 27, 2004)
- 「조선왕조시대에 있어서의 진전의 발달」(조선미, 『고고미술』 165,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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