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융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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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화성 융릉과 건릉 중 융릉
화성 융릉과 건릉 중 융릉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조선후기 제21대 영조의 아들인 장조와 왕비 헌경왕후의 능.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화성 융릉과 건릉(華城 隆陵과 健陵)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경기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안녕동)
목차
정의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조선후기 제21대 영조의 아들인 장조와 왕비 헌경왕후의 능.
내용

1970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장조(莊祖)와 그의 비 헌경왕후(獻敬王后)의 능이다. 근처에 위치한 건릉(健陵)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장조는 1735년(영조 11) 창경궁에서 탄생해 그 이듬해에 세자에 책봉되고, 1762년 28세 때 창경궁에서 죽었는데, 영조가 뒤에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세자(莊獻世子)라 하고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 의황제(懿皇帝)로 다시 추존되었다.

헌경왕후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로서 1744년 세자빈에 간택되었다가 세자가 죽은 뒤 1762년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정조 즉위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다. 1815년(순조 15) 80세로 창경궁에서 죽었는데, 1899년 의황후(懿皇后)로 추존되었다.

융릉은 원래 경기도 양주시의 배봉산(拜峰山)에 있었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의 옛 도읍 뒤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의 어느 원보다도 후하고 창의적인 상설(象設)을 하였다.

능상설은 병석(屛石)을 두르고 인석(引石)은 화뢰형(花蕾形)으로 하고 문무석인을 세웠다. 장명등은 전기의 8각 장명등과 숙종 · 영조 연간에 등장한 4각 장명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 세웠다.

석인도 예전에는 가슴까지 파묻혀 있던 목이 위로 나와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등 조각 수법이 사실적이다. 능의 뒤에는 곡장(曲牆)을 돌렸다. 19세기 이후의 능석물 양식(陵石物樣式)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우리고장의 문화유산』(경기도 화성군, 1982)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재대관-사적편-』(문화재관리국, 1975)
집필자
정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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