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은문

  • 역사
  • 유적
  • 조선 전기
  • 조선 후기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었던 조선시대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門).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정계옥 (문화재연구소, 고고학)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서울 영은문 주초와 독립문 미디어 정보

서울 영은문 주초와 독립문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었던 조선시대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門).

내용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이다. 현재 독립문이 있는 곳의 바로 앞에 있었다. 새 임금이 즉위하여 중국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는 것이 상례였다.

1407년(태종 7)에 송도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모화루를 세웠다가 1430년(세종 12)에 모화관으로 개칭하여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金安老) 등 세 정승이 아뢰어 모화관 남쪽의 홍살문을 개축하여 청기와를 입히고 영조문(迎詔門)이라는 액자를 걸었다.

1539년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칙사가 올 때에는 조(詔)ㆍ칙(勅)과 상사(賞賜)를 가지고 오는데, 영조문이라 함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고 영은문(迎恩門)이라 써서 걸도록 하여 이에 따라 이름을 고쳤다.

임진왜란 후인 1606년(선조39) 영은문을 재건한 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와서 액자를 다시 써서 걸었다. 그 편액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청일전쟁 후인 1896년 모화관은 사대사상의 상징물이라 하여 독립관(獨立館)이라 고쳐 부르고, 영은문을 헐고 독립협회 주도로 성금을 모금하여 독립문을 세웠다.

영은문의 기둥을 세웠던 서울 영은문 주초는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독립문 바로 앞쪽에 있다. 주초석은 방형의 배흘림 장초석(長礎石)인데 4방의 모를 죽여 8각같이 보이고 위에는 가구구조(架構構造)를 고정시켰던 홈이 있다.

참고문헌

  • - 『궁궐지(宮闕志)』

  • - 『서울 육백년사』(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7)

  • - 『서울시문화재대관』(서울특별시, 1987)

  • -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 - 『문화재대관 -사적편-』(문화재관리국, 1975)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