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 지금의 종로구 통의동 35번지 및 그 부근)에 있었다. 이곳은 원래 효종의 4녀인 숙휘공주(淑徽公主)의 부군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의 옛집이었다. 그런데 숙종이 사서 그의 4자인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에게 주었다.
이 때 숙종은 특별히 궁에 있는 누헌(樓軒)을 양성헌(養性軒)이라 이름짓고, 친히 시 2절을 지어 현판하게 하였다. 1719년(숙종 45) 2월에는 영조의 세자인 효장세자(孝章世子 : 뒤에 眞宗으로 추존됨.)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 한성부좌윤 홍석보(洪錫輔)의 주청에 따라 왕의 잠저시 호적을 따로 떼어 이곳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뒤에 장보각(藏寶閣)을 짓고 영조의 어용(御容) 2점과 어필(御筆)ㆍ유서(諭書) 등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1754년(영조 30)에는 이 궁 안에 의소묘(懿昭廟)를 짓고 정조의 형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을 향사하였다. 1870년(고종 7) 정월에는 정조의 왕세자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우인 문희묘(文禧廟)를 안국방(安國坊)으로부터 창의궁 궁내의 의소묘 안에 있는 별묘(別廟)에 옮겨서 봉하고 향사하였다.
1900년에 의소묘와 문희묘를 한성부 남부 훈도방(薰陶坊) 앞에 있는 영희전(永禧殿)에 옮겨 봉안하고, 1908년 7월에 의소묘ㆍ문희묘의 신위를 매장함으로써 창의궁은 폐궁되었다. 그 뒤 이 궁터는 주택가로 변하였다.
이곳에는 흉고둘레 5m, 높이 16m, 수령 600년의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통의동백송(通義洞白松)이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태풍 피해로 가지가 찢어져 1993년 지정 해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