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강화도는 나라의 안위를 보장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되었다. 임진왜란 때 진전은 큰 피해를 입었고 광해군 때 대부분 중건되었다. 그러나 평양 영숭전에 모셨던 태조 어진(御眞)과 양주 봉선전에 모셨던 세조 어진은 남별전에 임시로 봉안해 두었는데, 이는 후금과의 전란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1622년(광해군 14)에는 강화도에 영숭전을 건립하여 태조와 세조의 어진을 옮겨 봉안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하는데, 이때 영숭전은 여러 왕들의 어진과 종묘 · 사직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1638년(인조 16)에는 유사시 여러 왕들의 어진뿐만 아니라 종묘 · 사직의 위패도 함께 봉안하기 위해 영숭전을 증건(增建)하였다.
이후 영숭전은 실록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하다가 1666년(현종 7) 정족산성 내 사각(史閣)으로 실록을 이안하면서 폐지되었다. 숙종은 1695년(숙종 21) 영숭전을 다시 중건하면서 이름을 장녕전으로 고쳤다. 당시 숙종은 자신의 초상화 2본을 그려 1 본은 창덕궁 선원전에 보관하고, 나머지 1본은 신하들 몰래 장녕전에 보관하고자 하였다.
신하들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끝내 자신의 어진을 장녕전에 봉안하였다. 이것은 숙종이 처음부터 보장지처(保障之處)인 강화도에 영숭전 중건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본인의 어진을 장녕전에 보관할 의도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숙종 사후 장녕전은 숙종의 진전으로 전환되면서 건물을 새로 지었다.
1695년 당시 건립된 장녕전은 5량 7칸 건물이었다. 가운데 칸에는 영희전에 모셨던 여러 왕들의 어진을 봉안하고, 동쪽 3칸과 서쪽 3칸에는 각각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모시는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1721년(경종 1) 장녕전은 숙종의 진전으로 전환되면서 진전의 건축제도에 따라 새롭게 건립되었으며, 이때 재실과 전사청, 제기고도 함께 건립하였다.
기존에 있던 장녕전은 어진을 옮길 때 사용하는 연여(輦輿)를 보관하고, 본전을 수리할 때 이안청으로 사용하는 별전(別殿)으로 기능이 바뀌었다. 영조 사후에는 강화도 만녕전에 있던 영조의 어진을 함께 봉안하면서, 장녕전은 숙종과 영조의 어진을 봉안한 진전이 되었다. 그러나 병인양요 때 전각이 훼철되고, 숙종과 영조의 어진은 선원전으로 옮겨 모시면서 장녕전은 그대로 폐지되었다.
장녕전은 병인양요 때 폐허가 된 강화부궁을 중건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강화부궁전도」와 『강화부궁전고』를 통해 건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강화부궁전도」에는 장녕전이 외규장각의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대지는 경사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여러 단으로 조성하였으며, 장녕전 앞에는 3칸 신문(神門)이 약간 축을 달리하여 서 있다. 그리고 담장 안에는 충의직소(忠義直所)가 동향하고 있다. 동쪽 담장에는 전향문(傳香門)이 있으며, 이 문을 통해 재실, 전사청, 향청 등 부속 건물들과 연결된다.
이처럼 장녕전은 여러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중심 건물인 본전은 진전의 건축 제도를 따라 가운데 3칸을 기준으로 정면과 좌우 측면에는 퇴칸이 부설된 구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전은 삼면에 모두 장지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바깥쪽에는 발이 쳐 있었다. 내부에는 정실(幀室)을 마련하여 어진을 봉안하였는데, 하부에는 습기 방지를 위해 온돌이 설치되어 있었다. 정실에는 상부에 닫집을 설치하지 않았고 분합문만 설치함으로써 일반적인 진전과 다르게 간략하게 구성하였다.
강화도 장녕전은 전쟁 등 유사시에 대비하여 여러 왕들의 어진과 종묘 · 사직의 위패를 모셔두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숙종 사후 숙종의 진전으로 전환되고, 이후 숙종과 영조의 어진을 함께 모시는 진전이 되었다. 장녕전은 정식 진전이라기보다 전쟁 등 유사시에 대비해 보장지처에 세워진 임시 진전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병인양요 때 피해를 입어 폐지되었으나, 조선 후기 어진 제작과 진전 제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