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청주가 함락되면서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비장 홍림(洪霖) 등이 대항하다가 순절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조정에서는 이봉상을 좌찬성으로 추증하고 충민공(忠愍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남연년에게는 병조판서를 증직하고 충장공(忠壯公)의 시호를 내렸으며, 홍림에게는 호조참판을 증직하고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1731년(영조 7)에는 세 명의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건립하고 삼충사(三忠祠)라고 하였으며, 1736년(영조 12) 호서어사(湖西御史) 오원(吳瑗)이 표충사(表忠祠)로 사액을 받았다. 이후 1814년(순조 14)에는 홍림의 방기(房妓) 해월(海月)이 열녀로 정표되었고, 홍림은 1871년(고종 8)에 충강공(忠剛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표충사는 처음에 청주읍성 북문 안쪽에 세워졌으며, 이봉상과 남연년을 병향(並享)하고, 홍림은 배향(配享)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폐지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1939년 도시계획에 의해 우암산 기슭으로 이건하였다.
표충사는 경사지에 자리하여 중심축 선상에 여러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표충사 묘정비가 있고 솟을대문인 삼충사문(三忠祠門)과 재실의 기능을 지닌 수풍정(樹風亭) 등 부속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삼충사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쪽에 표충사 이건사실비가 서 있다. 사당 영역은 내삼문과 담장으로 인해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안마당 한쪽에는 삼충사 사적비와 해월(海月)의 열녀각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은 잘 다듬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정면 3칸 · 옆면 3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집으로 표충사(表忠祠)라는 편액을 달았다. 공포는 2익공 형식이며, 정면의 벽체와 창호 모두 널판을 사용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측면과 배면의 벽체는 하부를 방화벽으로 구성하였다. 작은 규모의 단순한 건물이지만 비교적 격식을 잘 갖춘 건물이다.
표충사는 조선시대 충효열 사상과 정표 정책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폐지되지 않고 유지된 사우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