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관(役官)은 일정한 액수의 은(銀)을 납부하거나 사재(私財)로 관비(官費)를 부담하여 참직으로 진입할 수 있는 관직으로서, 문하녹사(門下錄事)・추밀원당후관(樞密院堂後官)・중서주서(中書注書)가 대표적이다. 원칙적으로 고려시대 관료들의 인사는 일정 기간의 근무를 채우는 고만(考滿) 혹은 질만(秩滿)을 해야 승진하거나 다른 관직으로 옮겨갈 수 있는 순자격제(循資格制)에 의거하였다. 하지만 역관은 1년만 근무하면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참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주로 경제력이 있는 의관자제(衣冠子弟)가 역관에 취임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선거지(選擧志)에 의하면, 역관제는 추밀원당후관・문하녹사 및 권무(權務) 입록(入祿) 이상인 사람이 은(銀) 6, 70근을 내면 참직에 제수되는 제도였다. 그러나 실제 운영은 관직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문하녹사・추밀당후관은 관청에 필요한 경비를 제공하고 참상직(叅上職)으로의 진입을 보장받았다. 이에 비해 권무관(權務官)은 정해진 액수의 은을 납부하고 참상에 제수되었다.
역관은 대체로 사족(士族) 중 재산이 많은 사람이 자신의 아들과 사위로 하여금 맡게 하였다. 경제적 부담이 번거롭고 무거웠으나 정해진 근무기간을 채워 차례대로 승진하지 않고 한꺼번에 뛰어올라 참상직에 제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역관제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하녹사와 당후관의 설치 시기와 권무관 제도의 정비를 고려하면 문종대 이후로 추정된다. 역관은 1년만 근무하면 참직에 나아갈 수 있는 관직이었지만, 감당해야 할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문하녹사와 추밀원당후관은 본연의 업무 이외에, 낭관(郎官)・승선(承宣)의 직숙(直宿) 비용과 팔관회・연등회 등의 연회비용을 사재(私財)로 충당해야 했다. 비록 역관이 참상직에 올라갈 수 있는 지름길이긴 하였으나 막대한 경제적 부담으로 말미암아 보임(補任)을 꺼리는 상황도 발생하였다. 때로는 가산(家産)을 기울여 마련하기도 하고 때로는 남에게 빚을 얻어 경비에 충당하였으며, 심지어는 백성들에게 미리 비용을 조달해두는 폐단까지 야기되었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3도감(三都監)과 5군녹사(五軍錄事) 중의 우두머리가 역관의 임무를 대행하기도 하고, 삼사도사(三司都事)와 내원서(內院署)・선관서(膳官署)의 승(升)과 영(令)이 역관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문하성・삼사・추밀원에 소속된 역관은 '주년참직(周年叅職)'의 원칙에 따라 1년이 지나면 참상으로의 진입이 가능하였던 데 비해, 내원서와 선관서의 관원은 이러한 혜택에서 제외되었다.
조선초에는 고려의 역관제를 ‘헐등(歇等)’으로 이해하였다. 헐등은 태종대에 마련된 이전(吏典)의 거관법(去官法)에서 ‘고만위두(考滿爲頭)’ 즉 임기가 채운 한 사람에게만 해당 관직을 제수하고 나머지는 한직(閑職)에 있으면서 차례를 기다리는 방식이었다. 이는 고려시기에 역관에 취임하여 참상직을 원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각 관사(官司)에서 한 사람에게만 제수하고 그 나머지는 차례에 따라 순차적으로 제수하는 방식이었던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파악된다.
역관제는 참직의 제수(除授)를 전제로 하여 국가나 관청에 경제력으로 기여하는 제도였다. 하지만 사족 혹은 의관자제라는 특정한 신분층을 대상으로 운영되었다. 경제적 능력만 있으면 관직에 나갈 수 있는 납속보관제(納粟補官制)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유학의 전통적인 '설관지의(設官之義)'와는 배치되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관제가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 등 주요 관청을 중심으로 오랜 동안 유지되었다는 데에서 고려시대의 신분제적 관제(官制) 운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