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철은 고려 후기 요양행성(遼陽行省) 평장정사(平章政事)를 역임한 부원세력(附元勢力)이다. 몽골식 이름은 바얀부카[伯顔不花]로, 누이동생이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이다. 원나라로부터 요양행성 평장정사에 임명되고, 고려에서는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을 체포하여 원나라로 압송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기황후의 위세를 믿고 토지를 점탈하는 등 횡포를 일삼았고, 쌍성총관부 반민과 역모를 꾸몄다는 점을 들어 권겸(權謙)·노책(盧頙)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본관은 행주(幸州). 고조할아버지 기윤숙(奇允肅)은 1255년(고종 42)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고, 증조할아버지 기홍영(奇洪穎)은 낭장(郎將) 벼슬을 지냈다. 할아버지 기관(奇琯)은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역임하였고, 할머니는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한 죽산박씨 박휘(朴暉)의 딸이다. 아버지는 총부산랑(摠部散郞)을 지낸 기자오(奇子敖)인데, 익산이씨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이행검(李行儉)의 딸과 혼인하여 5남 3녀를 두었다.
기철은 차남이고, 장남은 기식(奇軾), 3남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기원(奇轅), 4남은 원윤(元尹) 기주(奇輈), 5남은 우상시(右常侍) 기륜(奇輪)이다. 장녀는 상의평리(商議評理) 조희충(趙希忠)과 혼인하였고, 차녀는 전의령(典儀令) 염돈소(廉敦紹)와 혼인하였으며, 막내가 원나라 순제(順帝)의 비(妃)인 황후 기씨(奇氏, 기황후)인데, 몽골식 이름은 울제이 쿠툭[完者忽都]이다.
기철은 부령김씨 김구(金坵, 1211~1278)의 아들인 김종화(金宗盉)의 딸과 혼인하여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개성윤(開城尹) 기인걸(奇仁傑), 차남은 찬성사(贊成事) 기유걸(奇有傑), 3남은 기세걸(奇世傑), 4남은 상호군(上護軍) 기샤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 5남은 기샤인부카[奇賽因不花]이고, 딸은 안동권씨 왕후(王煦)의 아들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왕중귀(王重貴)와 혼인하였다.
기철은 1338년(충숙왕 7)경 정순대부(正順大夫) 좌상시(左常侍)로 재직한 것이 확인된다. 충혜왕 복위 후 원나라에서 기철을 정동행성(征東行省)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하고 ,고려에서는 정승에 임명한 후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으로 봉하였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3월에는 권적(權適)과 함께 원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파견되었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8월 기철은 이운(李芸) · 조익청(曺益淸) 등과 함께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충혜왕의 비행을 고발하여 폐위를 건의하고, 같은 해 11월 충혜왕의 체포와 압송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충혜왕 체포 후 홍빈(洪彬)과 함께 정동행성을 관장하였으며, 충목왕이 원나라에서 즉위하여 고려로 돌아오자 행궁(行宮)으로 가서 국새(國璽)를 올리기도 하였다.
공민왕 초기에 기철은 요양행성(遼陽行省) 관리로 활동하였다. 1355년(공민왕 4) 1월 원나라에서는 요양행성의 좌승(左丞)이었던 기철을 평장정사(平章政事)로 승진시켰으며, 이듬해 4월에는 ‘대사도(大司徒)’를 더해서 그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1356년(공민왕 5) 5월 공민왕은 기철 등 부원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반원 개혁을 추진하였다. 기철 세력이 기황후의 위세를 믿고 토지와 인구를 점탈하는 등 횡포를 일삼았다는 점, 쌍성총관부 반민을 끌어들여 역모를 꾸몄다는 점 등이 부원세력 숙청의 배경이었다. 공민왕은 그해 5월 18일 곡연(曲宴)을 열어, 기철 · 권겸(權謙) · 노책(盧𩑠)과 그 일족을 초대한 후, 이들이 도착하는 대로 모두 주살(誅殺)하고, 피신한 경우에도 끝까지 찾아내어 처단하였다. 주살된 인원수만 25명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 숙청이었다.
부원세력 숙청에 이어서 반원 개혁조치도 차례차례 추진되었다.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하고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하였으며, 인당(印璫)을 보내 압록강 건너 파사부(婆娑府) 등 3참(站)을 공격하여 고려 영토로 편입하고, 원나라 지정(至正) 연호를 정지하여 고려가 원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선언하였다.
부원세력 숙청과 반원 개혁의 정보를 입수한 원나라에서는 두 달 뒤인 7월에 중서성 단사관(斷事官) 사데이칸[撒迪罕]을 보내 국경 침입을 문제삼는 내용의 조서를 전달했다. 이에 대해 공민왕은 인당을 처형하여 성의를 보이는 한편, 부원세력 숙청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의 표문을 보내 무마하고자 하였다.
기씨 일족의 처형 소식을 들은 기황후는 이에 분노하면서 자신의 아들인 황태자 아유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에게 복수를 강요하였다. 뒷날 원나라가 덕흥군(德興君)을 고려 왕으로, 기삼보노(奇三寶奴)를 그 원자로 옹립하여 최유(崔濡)를 보내 고려를 침입하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 속악조에 실려 있는 「총석정(叢石亭)」이 기철의 작품이라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