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금마(金馬)이며, 상서좌복야 한림학사승지를 지낸 이주(李湊)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진주사록(晉州司錄)이 되었다가 상서도사(尙書都事)가 되어 직사관(直史館)을 겸하였다. 뒤에 지홍주사(知洪州事)가 되었는데, 삼별초의 난으로 홍주가 함락될 때 포로가 되어 그들의 인사(人事)를 맡았다가 김방경(金方慶)에게 토벌되면서 붙잡혔다. 김방경의 아버지인 김효인(金孝仁)의 제자였다고 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뒤에 청주목사 지곡주군사 풍주부사(淸州牧使知谷州郡事豐州府使)를 역임할 때에는 행정을 잘하여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충렬왕 때 사간이 되어 정랑 임정기(林貞杞)와 봉의랑(奉議郎) 고밀(高密)의 임명장에 동의하는 서명을 거부한 것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섬으로 귀양갔다가 이존비(李尊庇)의 주선으로 풀려났다.
뒤에 전법랑(典法郎)이 되었는데, 이때 정화원비(貞和院妃)가 왕의 총애를 받고 양민을 종으로 삼으려 하자, 왕명을 어기면서까지 극력 반대하였다. 국학전주 보문각직학사(國學典酒寶文閣直學士)를 거쳐 언부전서(讞部典書)로 치사(致仕)하였다.
불경을 손수 베껴 읽을 정도로 불교를 깊이 신봉하였으며, 딸은 기자오(奇子敖)에게 출가하여 뒷날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가 되는 기씨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