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아버지는 경유(慶綏)이고, 어머니는 고려 충렬왕 때 정승을 역임한 안동김씨 김방경(金方慶)의 딸이다. 부인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한 청주정씨 정해(鄭瑎)의 딸이자 남양홍씨 홍규(洪奎)의 외손녀로, 충숙왕비 덕비(德妃) 홍씨가 그의 처이모인 셈이다.
경사만은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경복흥(慶復興)으로 공민왕 때 수시중(守侍中)을 역임했다. 첫째 딸은 판사 전득량(田得良)과 혼인하였고, 둘째 딸은 청주한씨 밀직부사(密直副使) 한공의(韓公義)와, 셋째 딸은 경주김씨 김성용(金成用)과, 넷째 딸은 경주최씨 최현우(崔玄祐)와 혼인하였다.
경사만의 벼슬살이와 정치 활동은 1321년(충숙왕 8)경부터 확인된다. 이해 10월 인사에서 경사만은 좌부대언(左副代言)으로 임용되는데, 이때 충숙왕은 원나라 수도 대도(大都)에 억류되어 있었다. 1320년(충숙왕 7) 12월에 원나라 영종(英宗) 황제는 충선왕(忠宣王)을 토번(吐蕃)으로 유배보내고, 이듬해 4월 충숙왕을 원나라로 불러들여 입조(入朝)케 한 후 고려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 사이에 심왕(瀋王) 왕고(王暠)를 고려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심왕파가 원나라 황실을 움직여, 충숙왕을 원나라 수도에 억류시키고 왕권을 정지시켜 충숙왕은 오랫동안 고려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경사만은 충숙왕이 원나라에 머무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관리하면서, 충숙왕의 복위 환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1322년(충숙왕 9) 1월, 경사만은 호군(護軍) 김인연(金仁沇) 등과 함께 대령군(大寧君) 최유엄(崔有渰) 이하 신료들에게 왕의 복위와 환국을 요청하는 글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탄원서가 완성되자 이를 김지경(金之鏡)과 조석견(趙石堅) 편에 부쳐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바치게 하였다.
이 탄원서는 심왕의 저지로 원나라 조정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심왕파 채하중(蔡河中)과 박인평(朴仁平)이 이 탄원서를 베끼고 와서 서명에 참여한 재상들을 힐책하는 한편, 경사만 · 김인연 · 김지경 등을 체포하여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경사만은 충숙왕비 덕비(德妃)의 명으로 같은 해 10월 석방되지만, 한동안 복직되지 못하다가, 충숙왕이 억류에서 풀려나 왕위를 회복하자 1324년(충숙왕 11) 4월 우대언(右代言)으로 복직하였다.
경사만은 충숙왕비 덕비의 조카사위라는 혈연 관계를 이용해 궁중에 자주 출입하였고, 이 때문에 환관과 다름없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사망할 때 장면도 극적이어서, 마니산 참성(塹城)에서 초제(醮祭)를 지내는데 하늘에서 “경대언(慶代言)은 불행히 단명하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얼마 안 되어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