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정현계(鄭玄繼). 자는 회지(晦之). 대장군 정의(鄭顗)의 손자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었으나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고 비서교감(秘書校勘)에 보임된 뒤 충렬왕 초에 대상부녹사(大常府錄事)로서 필도치(必闍赤: 서기직)가 되었고, 왕을 시종하여 원나라에 다녀온 뒤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올랐다.
1292년(충렬왕 18) 우승지가 되어 전주(銓注: 인사행정)를 관장함에 공정하다는 평이 있었다. 지신사(知申事)·부지밀직(副知密直)·남경유수(南京留守)·광릉부윤(廣陵府尹)을 거쳐 1298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올랐으나, 한희유(韓希愈)를 무고한 사건으로 이듬해 파직되었다.
1303년 첨의참리(僉議參理)에서 밀직사사, 이듬해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고, 1305년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가 별세하였다.
1305년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한종유(韓宗愈)·김영돈(金永旽)·장자빈(張子贇) 등을 시취(試取)하였으며,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성낭중(征東行省郎中)·유학제거(儒學提擧)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외유내강의 성품으로 마음은 너그럽고 조용하나 일에는 민첩하고 용감하다는 평을 들었다. 시호는 장경(章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