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중귀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좌부대언, 동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등을 역임한 문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369년(공민왕 18)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좌부대언|동지밀직사사|감찰대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고려 후기에, 좌부대언, 동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정승(政丞) 왕후(王煦)의 아들이며, 기철(奇轍)의 사위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공민왕 초에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고, 1356년(공민 5) 5월 기철 등이 제거될 때 유배되었다가 1364년(공민 13) 10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어 같은 달 원에 천추사(千秋使)로 파견되었다. 다음해 3월 재차 동지밀직사사에 임명되었지만 같은 해 6월 신돈(辛旽)에 의해 파직되었다.

그때 나라의 비밀을 원나라에 누설하였다는 무고로 다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었다. 1367년(공민 16) 3월에는 전 동지밀직사사로서 원에 성절사(聖節使)로 파견되었으며, 1369년(공민 18) 3월에는 동지밀직사사로서 원에 성절사은사(聖節謝恩使)로 파견되었지만 길이 막혀 돌아오기도 하였다. 같은 해 11월 북원(北元)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귀국한 서원군(瑞原君) 노은(盧訔)이 당시 배원정책(排元政策)을 쓰고 있던 조정에 의하여 문초를 받을 때, 고문에 못이긴 그의 거짓진술로 북원과 밀통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효수되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죄 없이 죽은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