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초명은 원정(元貞), 호는 퇴옹(退翁)이다. 원관(元灌)으로 쓰기도 한다. 아버지는 충렬왕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원부(元傅)이고, 동생이 충렬왕 때 응방(鷹坊)을 관장하였던 원경(元卿)이고, 아들은 충숙왕 때 첨의찬성사에 오른 원충(元忠)이다. 세 번 장가들었는데, 장인은 홍녹도(洪祿道)·곽세필(郭世弼)·김신(金信)이다.
1266년(원종 7) 5월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279년(충렬 5) 3월에는 독로화(禿魯花: 인질)로서 원에 보내졌다. 그 뒤 고려에 돌아와 1287년 부친상을 치른 후 정헌대부(正獻大夫) 전법판서(典法判書) 문한학사(文翰學士) 지첨사부사(知詹事府事)가 되었지만 환관과 내료의 비방으로 인해 파직되었다.
1289년(충렬 15) 정헌대부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지제고(知制誥)가 되었다. 1298년(충렬 24) 11월 충렬왕이 복위한 직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판도판서(版圖判書)에 임명되었고, 1307년(충렬 33)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시랑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 상의도첨의사(商議都僉議事)가 되었고, 1309년(충선 복위 1) 4월에는 밀직사(密直使)로서 민부판서를 겸하였다. 그는 첨의찬성사로서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개경 북쪽에 있던 구룡산(九龍山)의 사나사(舍那寺)의 중창을 주도하였으며, 절강(浙江)에서 대장경 1부를 조성하여 항주(杭州)의 혜인사(慧因寺)에 봉안하는 수년간의 작업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한 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