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지방의 토성(土姓)으로 본관은 분명하지 않다.
목종(穆宗) 때 중추사우상시(中樞使右常侍)로서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가 되었다. 1009년(목종 12) 김치양(金致陽)이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와 사통해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난을 일으켰을 때, 목종의 명을 받고 궁궐수비를 위해 개경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개경에 도착하기 전 동주(洞州: 현재 황해도 서흥)의 용천역(龍泉驛)에 이르렀을 때 내사주서(內史注書) 위종정(魏從正)과 최창회(崔昌會)가 거짓으로 전한 개경의 소식을 듣고, 자신이 천추태후의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해 다시 본영(本營)으로 되돌아갔다.
한편 천추태후는 군사들이 오는 것을 꺼려 내신을 보내어 절령(岊嶺: 현재 황해도 황주군의 자비령)을 막고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였다. 이러한 사태를 걱정한 강조의 아버지는 종을 승려로 변장시켜 죽장(竹杖) 속에 서신을 넣어 보내 아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에 들어 와 국난을 평정하도록 하였다.
편지를 받자 강조는 목종이 죽은 것으로 인식하고 부사(副使)인 이부낭중(吏部郎中)이현운(李鉉雲) 등과 함께 갑졸(甲卒) 5천인을 거느리고 황해도 평주(平州: 현재 황해도 평산)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왕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고 즉시 군사이동을 멈추었다. 이때 여러 장수들이 이제 와서 주저할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자 다시 군사를 일으켜 개경으로 들어갔다. 목종을 폐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궁궐을 점령한 뒤 황보유의(皇甫兪義)와 김응인(金應仁)을 시켜 김치양 일파에 의해 신혈사(神穴寺)로 쫓겨나 있던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 훗날의 현종)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보내 도망간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庾行簡) 등 7인을 죽이고, 천추태후의 친속 30여 인을 귀양 보냈다. 또한 목종을 폐위시켜 태후와 함께 충주로 보냈는데 그 도중에 상약직장(尙藥直長)김광보(金光甫)를 시켜 살해함으로써 대권을 장악하였다.
그 뒤 새로운 국가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관제개혁을 실시하였다. 은대(銀臺: 승정원)와 중추(中樞) 남북원(南北院)을 일시에 혁파하고 대신 중대성(中臺省)을 설치해 세 관청의 기무를 모두 이곳에 소속시켰다. 은대와 중추원은 국왕의 측근보좌기구임과 동시에 그 동안의 정치가 모두 이 기관을 통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의 혁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계속된 관직개편에서 자신은 중대사(中臺使)에 오르고 중대부사(中臺副使)에 이현운, 직중대(直中臺)에 채충순(蔡忠順), 상서우승 겸 직중대(尙書右丞兼直中臺)에 윤여(尹餘)를 임명하였다. 이러한 인사조처는 국왕 측근직의 단일화를 꾀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군사권을 배경으로 한 자신의 권력집중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더욱이 1009년(현종 즉위년) 3월에는 이부상서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에까지 오름으로써 당시 제일의 실력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거란의 침입으로 강조의 대권은 제대로 행사되지도 못하고 좌절되었다. 1010년 11월, 거란의 성종(聖宗)은 목종을 죽인 죄를 묻겠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워 쳐들어왔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지난 993년(성종 12)의 제1차 침입 때 강동육주(江東六州)의 영유권을 고려에 넘겨주었다는 것과 고려가 송나라와 화친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이에 강조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가 되어 거란군과 맞서 싸웠다. 거란군이 양규(楊規)와 이수화(李守和)의 분전으로 난항을 겪게 되자 흥화진(興化鎭: 현재 평안북도 의주)을 단념하고 통주(通州: 현재 평안북도 선천)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강조가 이들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강조는 통주성 남쪽까지 내려와 물을 사이에 두고 세 곳에 진을 치게 하였는데 거란군이 중앙을 찌르면 양쪽에서 호응하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번번이 승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무기인 검차(劒車: 차체와 바퀴살에 단검을 빈틈없이 꽂아 적의 접근을 막는 2륜전차)를 만들어 거란군을 대파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승리에 방심하여 거란군의 공격을 경계하지 않았고, 결국 대항할 기회를 잃고 패배하였다. 이때의 패전으로 많은 병사가 죽고, 부장(副將) 이현운,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郎)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노의(盧顗), 양경(楊景), 이성좌(李成佐) 등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이때 거란의 성종이 자신의 신하가 되어달라고 권유하자, “나는 고려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는가?” 하며 단호히 거절해 고려인의 늠름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반면에 이현운이 성종의 신하가 되겠다고 뜻을 굽히자 발길로 걷어차면서 고려인의 긍지를 잃지 말라고 나무라면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