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년(현종 1)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행영도통판관(行營都通判官)으로 강조(康兆)의 휘하에 종군하여 거란과 싸우다가 강조와 함께 적에게 사로잡혔다.
『고려사(高麗史)』 양규(楊規) 열전에 따르면 “거란군이 노전을 통주(通州)에 보내어 항복을 권하는 격문(檄文)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가 그곳에 억류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1298년(충선왕 즉위년)에 충선왕은 즉위년 교서에서 “거란병을 격퇴한 서희(徐熙) · 하공진(河拱辰) · 노전 · 양규 등의 내외손(內外孫)과 현손(玄孫) 중에서 1명에게 초입사(初入仕)를 허(許)하라.”고 하였고, 1308년(충선왕 복위년)에 충선왕은 또한 복위년 교서에서 “현종 때의 공신 하공진 · 노전 · 양규 등의 내외현손(內外玄孫)의 현손은 예에 따라 1호(戶)에 1명에게 초직(初職)을 허락하라.”고 하였다.
1014년에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올랐고, 1017년에 중추부사 상호군(中樞副使上護軍)이 되었으며, 1023년에 삼사사(三司使)가 되었다가 1031년(덕종 즉위년)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