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육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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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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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서북면 지역에 시행했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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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강동육주는 고려시대에 서북면 지역에 시행했던 제도이다. 흥화·용주·통주·철주·구주·곽주 등을 말한다. 고려가 건국될 당시 서북면의 압록강 유역에 여진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993년 고려에 침입한 거란은 고려왕의 입조(入朝)와 거란의 연호 사용을 조건으로 철수하였다.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점유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고려는 여진 부락을 소탕하고 6개 고을을 설치하였다. 거란은 이곳의 반환을 요구하며 두 차례 침략하였으나 고려는 양규와 강감찬의 활약으로 북방 영토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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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시대에 서북면 지역에 시행했던 제도.
개설

흥화(興化 : 義州 以東) · 용주(龍州 : 지금의 龍川) · 통주(通州 : 宣川 西北) · 철주(鐵州 : 지금의 철산) · 구주(龜州 : 지금의 龜城) · 곽주(郭州 : 지금의 郭山) 등을 말한다.

내용

국초 고려의 영토는 서북 방면으로는 청천강과 박천강(博川江)선에 머물고 있어 그 북쪽 압록강 유역까지는 여진족이 잡거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의 북쪽 축성이 청천강 · 박천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군사 · 교통상의 요지인 이 지역에 여진족이 살고 있어서 북진정책을 내세운 고려의 북방진출에 큰 장애가 되었다.

그런데 마침 993년(성종 12) 거란의 제1차 침입을 계기로 고려는 그 숙원을 이루게 되었다. 즉, 그 해 10월 소손녕(蕭遜寧)을 도통(都統)으로 한 거란군이 침입해 봉산군(蓬山郡 : 泰川과 龜城 사이)을 함락시키고 고려에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고려의 항전으로 안융진(安戎鎭 :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 서남쪽) 공격에 실패하였다.

그러자 결국 거란은 고려와 강화를 맺고 고려가 압록강 이동 지역을 갖는 것에 동의하였다. 즉, 당시 강화회담에서 소손녕은 신라 땅에서 일어난 고려인데도 자기들이 점유한 고구려의 옛 땅을 함부로 침식하고 있다는 것과, 송나라와 교빙하고 있는 점을 들었다. 그래서 강화조건으로 영토의 할양과 거란과의 교빙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거란 측의 요구에 대해 당시 고려는 거란의 침입이 영토 확장보다는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데 있음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서희(徐熙)는 고려가 엄연히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므로 거란의 동경(東京 : 遼陽府)까지도 고려의 영토가 되어야 하며, 교빙 관계에서도 고려와 거란의 사이에는 여진이 있어 내왕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이 지역을 회복해 도로를 확보해야만 교빙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능숙한 서희의 북진의 필요성에 소손녕은 고려왕의 입조와 거란의 연호 사용을 조건으로 해 압록강 동쪽 여진의 거주 지역 280리의 점유를 인정하는 화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리하여 고려는 994년 거란으로부터 점유를 인정받은 압록강 동쪽의 여진부락을 소탕하고, 장흥(長興) · 귀화(歸化) · 곽주 · 구주 · 안의(安義) · 흥화 · 선주(宣州) 등에 점진적으로 성보를 쌓아 비로소 숙원인 압록강 연안에 진출하게 되었다.

또한, 이곳을 통치하기 위해 흥화 · 용주 · 통주 · 철주 · 구주 · 곽주 등 육주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서북면의 군사 · 교통상의 요지인 이 강동육주를 통해 대륙세력의 침입을 막아내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생활권이 압록강을 자연경계로 해 확장하였다.

그 뒤 강동육주, 특히 흥화진 · 통주 · 곽주 등은 1010년(현종 1) 거란의 제2차 침입 때 주요 격전지로서 거란군의 맹렬한 진격을 막아내는 요충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구주에서 양규(楊規)는 되돌아가는 거란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 뒤 거란은 야율행평(耶律行平) · 이송무(李松茂) 등을 고려에 보내 강동육주의 반환을 요구해 왔다. 그리고 강동의 여러 성을 탈취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압록강 위에 부교를 가설하고, 동쪽 해안에 보주성(保州城)을 구축하는 등 고려에 대한 무력침략태세를 갖추었다.

고려의 계속되는 친송정책과 강동육주의 반환 거절에 거란은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한 제3차 침입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압록강 부교 및 보주성의 설치 등으로 군비를 강화한 거란의 제3차 침입도 강감찬(姜邯贊)의 구주대첩(龜州大捷)으로 대패하였다. 이후 구주대첩(귀주대첩)의 승리는 강동육주 지역이 갖는 전략적 기능이 크게 기여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요사(遼史)』
「고려초기의 영토의식과 국경 분쟁」 (신안식, 『軍史』 105, 2017)
「북방민족(北方民族)과의 항쟁(抗爭)」(박현서, 『한국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81)
「여단무역고(麗丹貿易考)」(이용범, 『동국사학(東國史學)』 3, 1955)
「契丹聖宗の高麗征伐」(池內宏, 滿鮮史硏究,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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