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칭 ‘빗돌대왕비’·‘설인귀사적비(薛仁貴事蹟碑)’라고도 한다. 경기도 양주시과 파주시 적성면, 연천군 금곡면의 세 군 행정구역에 걸쳐 있는 높이 675m의 감악산 정상에 세워져 있다.
비신(碑身)은 높이 170㎝, 두께 15∼19㎝, 너비 77∼79㎝이며 허리부분의 너비는 70㎝이다. 자연석을 장방형으로 잘라 표면을 곱게 다듬어 각자(刻字)한 것 같다.
지금의 개석(蓋石)은 후대의 것이지만, 개석을 부착할 수 있도록 비신 윗부분에 凸모양의 축을 이루고 있어, 본래부터 개석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현재 비문은 오랜 세월 동안 글자가 없어져 고증할 수 없는 이른바 몰자비(沒字碑)이다.
이 비를 신라고비로 추단하는 근거는, ① 비의 양식이 서울 북한산 정상에 세워져 있던 진흥왕순수비와 흡사하고, ② 『삼국사기』에 신라시대부터 고성(高城)의 상악(霜岳)·설악(雪岳), 북한산주(北漢山州)의 부아악(負兒岳)과 더불어 감악산이 매년 국가에서 소사(小祀)를 지냈던 명산으로 적혀 있는데, 여기에 세워진 비이기 때문이다. ③ 비가 세워진 일대에서 삼국시대의 기와조각이 출토되고 있는 것도 방증이 된다.
감악산 고비로부터 북동으로 약 4.5㎞ 지점에 있는 칠중성(七重城)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지배권을 다투던 삼국간의 혈투장이었고, 그 뒤 거란침입과 6·25남침 때 고랑포(高浪浦)싸움이 있었던 곳이다.
칠중성의 안산(案山 : 집터나 묘자리 맞은 편에 있는 산)인 감악산에 고려시대부터 여러 신을 모신 사당이 세워진 것은 군사적 요지이기 때문이며, 이 비를 당나라의 명장 설인귀의 사적에 부회(附會)시킨 속설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감악산이 차지하는 전략적인 위치와 이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역사상의 여러 사건, 비의 양식이나 크기가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와 거의 같다 하여, 일부에서는 이 비를 또 하나의 진흥왕순수비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이 알려지지 않아 아직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