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중성 ()

파주 칠중성
파주 칠중성
인문지리
유적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중성산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석축 성곽. 산성.
이칭
이칭
중성, 토탄성(吐呑城), 토탄고성(吐呑古城)
정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중성산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석축 성곽. 산성.
개설

칠중성은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군사적 요충지로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7세기 중반 이후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고 나당전쟁시 당군의 침입로가 되기도 하였다. 이름으로 인하여 여러 겹성(重城)으로 추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밀지표조사 결과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 적성 부근 임진강의 옛이름 ‘칠중하’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중성산 정상부와 그 서쪽 봉우리(해발 142m) 8~9부 능선을 감싸고 축성되었다. 전체 형태는 말안장과 유사하다. 내부는 북동쪽이 가장 높고 동벽의 진입로 부분이 낮다. 성 북쪽으로 임진강 강안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어 이 방향의 조망에 유리하다. 한국전쟁 이후 성내부는 군부대 시설이 들어서 곳곳이 삭토되고 훼손되었다. 성벽도 상당부 군사시설로 훼손되었으나 성벽 형태는 짐작이 가능하다. 아직 발굴조사는 실시된 적이 없다. 다만 정밀지표조사 결과 추정 문지 2개소, 추정 수구지(또는 문지) 1개소, 추정 건물지 5개소, 우물지 2개소 등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 변천

638년 고구려가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무렵 칠중성이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660년 현령 필부가 백성들과 고구려군과 싸우다 점령당했다. 이후 고구려 멸망시까지 고구려의 영토였다. 667년 신라군이 평양으로 진군하기 전에 고구려 칠중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고구려 멸망 후 668년부터 675년까지 나당전쟁기에는 당군의 한강 유역 진입을 방어하는 거점이었다. 673년 당나라군이 칠중성에 침입하여 신라의 지원을 받아 주둔 중이었던 고구려 부흥군을 전멸시키기도 하였다. 675년 당군이 칠중성을 공격하여 신라의 소수(小守) 유동이 전사하였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토탄성, 토탄고성 등으로 기록되었다.

내용

칠중성 성벽은 석축으로 대부분은 면석이 탈락되어 뒤채움석이 노출되어 있다. 단절되거나 하부가 노출된 구간에서는 보축성벽이 노출되어 있고 체성벽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체성벽은 장방형의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여 면과 모를 잘 맞추어 빈틈없이 축조하였다. 화강암이나 편마암이 주류를 이루나 멀리 임진강에서 조달한 현무암도 사용되었다. 뒷채움한 돌은 대체로 마름모꼴 형태인데 성벽 안쪽 방향으로 놓아 서로 엇물리도록 쌓았다. 외벽 하단부에는 잘 다듬은 장방형의 석재를 매단 들여쌓아 보축하였다. 보축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체성벽의 1/3∼1/2 지점까지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보수된 흔적이 보이기도 하여 여러번에 걸쳐서 고쳐쌓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은 대부분 삭토되어 정확한 형태와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주변에서 기와들이 다량으로 수습되고 있어 건물지로 추정될 뿐이다. 문지는 동문지와 서문지가 있다. 성벽이 움푹 꺼진 형태이다. 이 밖에 수구지도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문지일 가능성이 있다. 우물지는 산정상부와 성벽 외부에서 발견되었다. 기록이나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우물지가 하나 더 있었다고 하나 현재 찾을 수 없다.

한편 칠중성은 백제 낭비성으로 비정되어 백제가 처음 쌓아 고구려와 신라도 이어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고구려 및 백제와 관련된 유물은 거의 수습되지 않았고 7세기 이후 신라유물이 주로 수습되었다.

특징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축조시기 및 성격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체성과 보축 등은 삼국시대 석축성벽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특히 보축은 7세기 후반 신라의 계단식 보축의 전형적인 형태로 주로 한강 이북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축조된 것으로 주목된다.

의의와 평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수많은 성 중에서 ‘삼년산성’과 함께 위치가 명확히 비정되는 곳으로 역사 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파주 칠중성 지표조사보고서』(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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