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년에 일어났으므로 경인(庚寅)의 난이라고도 한다. 정중부 등이 반란을 일으켜 문신귀족정치를 타도하고 무신정권을 수립해 고려사회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예종 때 여진의 정벌,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 등으로 무신의 지위가 크게 상승하였다. 그러나 문존무비(文尊武卑)의 풍조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은 고사하고라도 군사행동에서 문신이 지휘관이 되고 무신은 아래에서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군인들이 적과 싸워 공을 세워도 불력(佛力)에 의한 것이라 하여 그 공을 부처에 돌리는 수가 많았다. 특히, 난이 일어날 무렵 문신귀족의 횡포와 수탈은 농촌경제를 크게 압박해 유민(流民)이 속출되고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 등 사회가 동요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예종 때부터 나타나 의종 때는 자못 심각해 문신귀족정치에 큰 위협이 되었다. 이러한 원인들은 마침내 난으로 폭발되었다.
1170년 놀이에 나섰던 의종은 호종하는 문신들을 거느리고 장단 보현원(普賢院)에 이르렀다. 이때 왕을 호종하던 대장군 정중부와 산원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비밀히 약속하기를 “우리들은 오른 소매를 빼고 복두(幞頭)를 벗을 것이니, 그렇지 않은 자는 모두 죽여라.”하여 왕을 호종하던 문신 대부분을 죽었다. 그리고 그날 밤 왕을 데리고 개성에 돌아와 중요문신 50여 명을 또 학살하였다.
반란세력들은 “문관(文冠)을 쓴 자는 서리라 할지라도 종자를 남기지 말라.”고 외쳤으나 문신들을 모두 없애지는 못하였다. 고려 문종 때 중앙 문관의 정원이 532인이고, 그 이속의 정원은 1,165인이었는데, 당시 학살된 문신은 100명 정도였던 것이다.
이에 의종은 상장군에게는 수사공복야(守司空僕射)를 가(加)하고, 대장군은 상장군으로 승격시키는 한편, 이의방과 이고는 응양·용호군(鷹揚龍虎軍)의 중랑장을 삼아 무마하려 하였다. 그러나 반란세력은 거사 3일째 되는 날 왕을 거제도로, 태자를 진도로 추방하고, 왕의 아우 익양공 호(翼陽公晧)를 왕으로 삼았다. 이가 바로 명종이다.
명종은 즉위해 곧 정중부·이의방·이고를 벽상공신(壁上功臣)에 봉하고 대사령을 내리는 등 인심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낱 괴뢰적 존재에 불과했고, 정치상의 실권은 반란세력의 수중에 들어가 무신에 의해 전제되는 무신정권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정중부의 난은 문신귀족세력을 타도하고 무신정권을 수립한 데에 의의가 매우 크다. 한편 이 난은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첫째, 무신정권은 문신귀족정치를 부정한 토대 위에서 성립하였다. 그러므로 문신들을 대량 학살했으며, 학살에는 정치적인 목적 이외에 감정적인 요소도 많이 작용하였다.
보현원에서 문신들을 학살할 때, 승선 노영순(盧永醇)은 무가(武家)출신이며 무신들과 사이가 좋았다는 것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또 개성에 들어와 문신들을 학살할 때에도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문극겸(文克謙)은 직신(直臣)으로 알려져 죽음을 면하였다.
대장군 진준(陳俊)은 “우리들이 미워하는 것은 문신 4, 5명인데 지금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여 더 이상의 학살을 극력 만류했던 것이다. 이렇게 학살에 감정적인 요소가 작용되고 있었으나, 반란세력은 문신들을 모두 죽이지 못했으며, 상당수의 문신들을 포섭해 자기 정권강화에 이용하였다.
둘째, 반란세력을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재물을 약탈한 것이다. 반란세력이 대세를 장악하자, 정중부·이의방·이고는 의종의 사재인 관북관(館北館)과 천동택(泉洞宅)을 비롯해 학살당한 문신들의 집을 점령하고 그곳의 수많은 재물을 획득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문신세력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였으며, 그 동안 쌓였던 울분에 대한 보복이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고려의 실권이 문신귀족중심에서 무신으로 옮겨가는 중대한 사회적 변혁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