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곡이라는 명칭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근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역시 사용되었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용된 부곡의 의미와 개념은 우리나라와 매우 다르다.
중국과 일본의 경우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호족세력 등에 예속되어 있는 사천민(私賤民)으로서 구체적인 신분계층 그 자체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와 달리 군·현과 같은 행정구획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흔히 부곡인이라고 한다.
부곡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이른바 향·부곡 등의 잡소는 거듭하여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所謂鄕所部曲等雜所不復具錄).”라고 기록된 내용이다.
이 기록만으로는 부곡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나 성격을 파악할 수 없으나 적어도 부곡이 삼국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부곡에 대해서 가장 명확하고 구체적인 설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여주목(驪州牧) 고적조(古跡條)에 있는 등신장(登神莊)에 관한 기록에 나온다.
여기에 “이제 살펴보건대 신라가 주군현을 설치할 때 그 전정(田丁)이나 호구(戶口)가 현이 될 수 없는 것은 향 또는 부곡으로 두어 그 소재하는 읍에 속하게 하였다.……위의 각각에는 토성이민(土姓吏民)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부곡이 삼국시대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인구나 토지가 군이나 현의 규모에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부곡에 대해서는 현재 기록의 부족으로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고려시대의 부곡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고려사』에 실려 있고, 같은 시기에 편찬되었던 『세종실록』 지리지 같은 지리서에도 부곡의 명칭과 위치 등이 충실하게 실려 있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고려시대 부곡집단은 상당한 규모였으며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표]로 미루어볼 때 부곡은 충청도·경상도·전라도 등 남부지역에 전체의 약 88% 정도가 분포되어 있고, 중부 이북지역은 분포비율이 그다지 높지 않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부곡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거의 소멸하게 된다. 『세종실록』 지리지가 편찬된 15세기 전반(1454년)까지 존속하고 있던 부곡은 68개소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16세기 전반(1530년)『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무렵에는 불과 14개소만 남아 있다. 그러니까 한국사에서의 부곡집단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사회변동과정을 통해 점차 소멸의 과정을 밟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부곡집단은 고려시대의 부곡집단이다. 고려시대는 부곡 이외에도 소(所)·처(處)·장(莊) 등 특수한 집단이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 집단을 통틀어 흔히 부곡제라 하며, 고려시대 군현제의 하부구조로 존재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려시대 부곡집단은 대체로 신라 말 고려 초에 후삼국 통합전쟁의 와중에서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태조실록』 태조 1년 8월조에는 “고려왕조 때 5도양계의 역자(驛子), 진척(津尺), 부곡(部曲)의 주민은 태조 때 명을 어긴 자들로서 모두 천한 역(役)을 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왕조는 후삼국 통합전쟁과정에서 왕조에 저항한 호족세력지역의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부곡민으로 편성하였다. 후삼국 통합 후 고려는 이 지역들을 법제적으로 부곡제라는 행정구획으로 편성, 군현제의 하부기구로 예속시키고 군현제를 통해 간접지배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부곡의 주민은 크게 부곡리(部曲吏)와 부곡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농업생산에 종사한다는 점에서 군현제하의 일반 양인 신분층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반왕조적 집단이었다는 점에서 국가에 의해 부가적으로 특정한 역을 부담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부곡인은 국가직속지인 둔전(屯田)·공해전(公廨田)·학전(學田) 등을 경작하였으며, 때로는 군사요충지에 동원되어 성을 수축하는 역을 부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국학(國學) 입학, 승려가 될 수 있는 자격 등에서 법제적으로 제한을 받고 있었다. 부곡리 역시 관직 진출에 있어서 5품 이상을 초과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법제적으로 양인 신분이면서도 일반 군현제하의 양인 농민층에 비해 추가적인 역을 부담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으로 훨씬 열세한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부곡인이 천시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한편, 부곡리는 하급 이족(吏族) 신분층으로서 국가의 관료체계 아래서 부곡인을 동원하여 특정한 역을 부담하도록 지휘, 감독하는 국가권력의 대행 임무를 맡고 있었다.
고려시대 부곡은 지방사회의 하부구조로서, 군현제에 예속되어 국가의 특정역을 부담하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군현제의 변동으로 인해 수취체계가 점차 변질되면서 부곡집단은 고유의 성격을 탈피하게 된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그 존재도 거의 소멸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