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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지방행정구역의 최하위 단위.
내용 요약

현은 지방행정구역의 최하위 단위이다.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지방행정구역 중에서 가장 낮은 단위로 독자적으로 존재하였다. 중앙집권화를 위한 제도로 군과 병렬적인 관계에 있었다. 대체로 인구 비례에 따라 크기가 정해졌다. 삼국시대에는 현과 비슷한 지방행정단위가 존재했다고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호족의 신분과 혈연 등을 참조해 편성되었는데 현령이 파견된 곳은 30곳에 불과하고,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305곳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모든 현에 현령 또는 현감이 파견되었으며 호구나 전결의 변동에 따른 재편은 거의 없었다. 1894년 갑오경장 때에 폐지되었다.

목차
정의
지방행정구역의 최하위 단위.
내용

주(州) · 부(府) · 군(郡) · 현(縣)의 지방행정구역 중에서 가장 낮은 단위이다. 현은 지방행정구역 상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도 군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는데 군현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군과 현의 관계는 군이 현을 거느리는 행정적 상급 단위라기보다는 병렬적 관계였다. 군현제도는 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행정체계이고, 이는 중앙집권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따라서, 전국의 군현은 정부가 동일한 정령(政令)으로 획일적이고 집중적으로 다스렸다.

군현제도는 일찍이 중국 진대(秦代)로부터 비롯되었다. 진시황(秦始皇)은 종전의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군현제도를 마련해, 이를 지방행정구획의 기본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전국의 각 지역을 모두 국왕에게 직접 예속되도록 하여 왕권을 크게 강화시켜 갔다. 즉, 주대(周代)의 봉건제도가 춘추시대(春秋時代)에 군현제도로 전환된 것이다. 그 뒤 중국의 역대 왕조와 주변 국가에서 지방통치행정의 기본 단위로 군현제도를 채택해 활용하였다. 춘추시대에는 현이 군보다 상위에 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와서 군과 현의 상하관계가 바뀌어 군이 현의 상위를 차지하였다.

중국에서는 현의 구분이 성격상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보통의 현으로 인구 비례에 따라 현의 크기가 정해졌다. 민(民)이 조밀한 곳은 현의 넓이가 좁았고, 그 반대로 민이 희박하면 현의 넓이는 넓어졌다. 둘째는, 주변 만이(蠻夷)의 현으로, 이를 도(道)라고도 칭하였다. 셋째는 황태자 · 황후 · 공주의 식읍(食邑)으로서의 현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 ·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에 군현제도를 정비함에 따라 현이 확립되었다. 삼국시대에는 현의 존재가 분명하지 않으나, 지방통치조직이 갖춰지는 과정에서 현과 비슷한 지방행정단위가 존재했다고 생각된다.

백제에서는 사비시대(泗沘時代)에 ‘방(方)-군(郡)-성(城, 縣)’의 체제가 마련되어 지방통치조직이 갖춰졌다. 물론, 이와 같은 통치체제의 정비는 지배질서를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시도되었다. 성은 현으로도 표기하였다. 『한원(翰苑)』에 “군현에 도사를 두었는데, 또한 이름이 성주이다[郡縣置道使 亦名城主].”라고 한 것에서 성과 현을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 석탑에 새겨진 주1에는 백제가 멸망할 당시, ‘5부-37주-250현’이라 하여 현의 이름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으나, 그 정확성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신라에서는 505년(지증마립간 6) 2월에 이 친히 전국에 주현제(州縣制)를 정하고 실직주(悉直州)를 두어 이사부(異斯夫)군주(軍主) 일을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현의 명칭이 독자적으로 성립되고, 군현제도가 확실하게 실행된 것은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일이다. 757년(경덕왕 16) 12월에 사벌주(沙伐州)를 고쳐 상주(尙州)로 삼고, 군 10, 현 30을 거느리게 하였다. 즉, 주 · 군 · 현 제도가 실시된 것이다.

고려시대의 현은 중앙에서 현령이 파견된 곳이 30곳인 데 비해, 중앙에서 현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屬縣)이 305곳이나 되어,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많았다. 속현은 외관이 파견된 다른 지방행정관청에 예속되었다. 속현은 신라 말 고려 초 전란과정에서 출현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속현이 발생한 때는 궁예 · 태조대이다. 즉 궁예나 태조는 무력으로 정복했거나 통제가 필요한 곳을 외관(外官)이나 직속군(直屬軍)을 주둔시켜 주변의 현을 복종시켰다.

현의 내속(來屬) 관계를 보면, 주로 수도인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 대부분이었고, 그것도 고려에 끝까지 항거하다가 정복된 지역에 집중해 있었다. 이러한 속현의 출현은 당시 고려의 지방통치의 일환이었다. 고려의 왕건은 자신에게 귀부 · 협조한 지방 세력에게는 그 지역의 통치권을 위임했지만, 복종하지 않거나 통제가 가능한 곳에는 중앙이 직접 통제하는 조직을 강구하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일부 외관의 파견이었다. 특히 고려의 특유한 제도로서 수령 외에 속관(屬官)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해 수령을 보좌하게 하는 속관제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고려의 현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두 335곳이다.

고려시대의 군현제도는 호족의 신분과 혈연 등을 참조해 계층적으로 편성하였다. 귀족 · 호족의 거주지는 부(府) · 목(牧) · 도호부(都護府)였고, 평민들은 군과 현, 천민들은 향(鄕) · 소(所) · 부곡(部曲)에서 무리지어 생활하였다. 군 · 현 등급이 오르거나 내리기도 했는데, 그곳 토착민의 충성도 및 주2를 기준으로 결정되었다. 군과 현이 목 · 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하고, 반대로 목 · 도호부 등이 일반 군현으로 강등된 예가 그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속현이 모두 소멸되어 모든 현에 현령 · 현감이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와 달리 인구와 전결(田結)의 기준에 따라 현의 넓이가 정해졌다. 큰 현 34곳에는 종5품의 현령이 파견되었다. 작은 현 141곳에는 종6품의 현감이 배치되었다. 이처럼 농촌을 지배하기 위해 설정된 군현제는 그 편성 기준을 호구(戶口) · 전결(田結)에 두었으나, 이의 변동에 따른 군현제의 재편은 거의 없었다. 다만 군현제의 외적 조건인 강상죄(綱常罪)나 반역죄 등에 대한 처벌로써 군현을 강등하는 것이 군현제 변동의 많은 원인이 되었다.

한편 농민 부담의 재조정이란 측면에서 제기된 이이(李珥)의 병성주현론(倂省州縣論)과 같은 군현제 재편 주장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농민 부담의 재조정에 초점을 맞춘 종전의 개혁안을 극복하고 향촌 사회구조 재편을 제시한 유형원(柳馨遠)의 군현제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 시기를 통해 농민 부담의 재조정이나 사회구조의 재편을 위한 군현제의 변동은 거의 없었다. 조선시대에 현령과 현감이 파견된 현은 모두 175곳이다.

현감 · 현령은 그 행정구역의 행정집행자로서 '수령'이었다. 조선 전기에 수령은 중앙의 통제가 강화되는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독자적인 향촌지배정책에 제한을 받았다. 따라서 중앙정부의 정책에 따라 피지배 농민들로서는 직접적인 수령의 간여가 그만큼 줄었으므로 피해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오면 전결세 및 호구정책 변화와 함께 수령권이 강화되어 인치주의(人治主義) 정책이 자행되면서 농민 수탈로 일탈하는 모순을 낳기도 하였다. 현의 제도가 없어진 것은 1894년 갑오경장에 의해서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한원(翰苑)』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연구』(이존희, 일지사, 1990)
『신라사』(신형식,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5)
『고려지방제도의 연구』(하현강, 한국연구원, 1978)
『고려정치제도사연구』(변태섭, 일조각, 1971)
「조선후기의 진휼행정과 군현지배」(구완회, 『진단학보』 제76호, 1993.12,)
「고려시대 외관(外官) 속관제 연구」(박종기, 『진단학보』 제74호, 1992.12.)
「고려태조대 군·현의 내속관계 형성」(김갑동, 『한국학보』 제52집, 1988)
「고려초기의 지방제도」(변태섭, 『한국사연구』57, 1987)
「신라 군현제의 연구동향 및 그 과제」(김갑동, 『호서사학』14, 1986)
「반계 유형원의 군현제론」(김무진, 『한국사연구』49, 1985)
주석
주1

蘇定方의 글.

주2

공로와 죄과를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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