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정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정면
건축
유적
문화재
충청남도 부여군 정림사터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석조 불탑. 국보.
이칭
이칭
평제탑(平濟塔), 백제오층석탑, 정림사지오층석탑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보(1962년 12월 20일 지정)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정림로 83 (부여읍, 정림사지) 정림사지박물관
내용 요약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충청남도 부여군 정림사터에 있는 백제의 석조 불탑이다.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지대석을 구축하고, 기단부 위에 5층의 탑신부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를 형성하였다. 이 석탑은 목조탑의 구조를 석재로 변형하여 표현하고 있다. 좁고 낮은 단층 기단, 얇고 넓은 옥개석의 형태 등에서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백제탑 형식 중 전형적인 석탑이자 석탑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세련되고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는 탑이다.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키워드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정림사터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석조 불탑. 국보.
개설

석탑미륵사지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함께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飜案)이라고 하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1981년에는 이 사지에 대한 전면발굴이 이루어져서 석탑 주변도 조사되었다.

석탑의 주변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가람배치의 전모가 밝혀졌고, 일찍이 석탑 주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태평8년무진정림사)’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초기에는 정림사라고 불렀던 것이 확실히 밝혀져, 그 뒤 이 석탑의 명칭을 정림사지오층석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평 8년은 1028년(현종 19)으로 사찰을 크게 중수하였던 해로 생각된다.

내용

이 석탑의 높이는 8.33m이며, 석탑의 구조는 일반적인 건축이나 석탑에서와 같이 주4을 구축하고 주5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주6를 놓고 정상에는 주7를 형성하였다.

기단부는 8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8매의 낮은 돌을 놓은 다음 양 주1주8, 면석이 16매로 조립되어 있는 중석을 놓았다. 중석 위에 주9은 8매로 구성되었으며 두껍다. 상부면은 약간의 경사가 있도록 하여 낙수면을 이루게 하였으며 탑신부를 받는 받침 없이 평평한 갑석 위에 탑신을 놓았다.

탑신부는 탑신과 주10이 108개나 되는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층의 조립형식은 같다. 초층탑신은 규격이 크기 때문에 12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네 귀퉁이에 주11이 있는 우주석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 면은 2매씩의 긴 판석을 끼웠다. 2층 이상의 탑신에 있어서는 2, 3층은 4매, 4층은 2매, 5층은 1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다.

각 층의 양쪽 우주에는 역시 배흘림이 표현되었으나 초층에 비하여 2층 이상 탑신의 높이가 급격히 체감되어 아주 낮아졌기 때문에 우주도 짧아서 배흘림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된 탑신석 전체에 비하여 우주의 폭이 넓은 점이 눈에 띈다.

각 층 옥개석은 낙수면부와 받침부가 별개의 석재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여러개의 판석으로 결구하였는데, 각 세부에서 목조가구의 변형수법을 볼 수 있다. 특히, 주2을 변형시킨 받침이나 낙수면 네 귀퉁이에서의 기와지붕의 우동마루형 등은 목조가구의 수법을 잘 보여준다.

옥개석 하면의 받침부는 4매의 각형 판석을 아래에, 그 위에 다시 8매의 각을 죽인 모죽임형 판석을 얹은 2단으로 미륵사지석탑에서 보이는 창방, 주12, 주13 등의 석재가 없고 목조건축의 공포 부분을 간략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모전석탑(模塼石塔)에서 시작된 신라의 석탑 역시 목조건축의 공포 부분을 간략화하여 지붕 아래를 내어쌓기로 하여 옥개 받침을 표현하였고, 통일신라 감은사지삼층석탑에 이르면 각형의 5단 층급받침 형태로 옥개받침이 정형화되고 낙수면은 지붕모양으로 경사를 나타나게 하였다.

낙수면은 평박하면서도 넓어서 늘씬한데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이 전체적으로 살짝 반전(反轉)되어 목조건축의 처마선처럼 경쾌하다. 옥개석 위에는 다른 돌을 놓아 높은 굄대를 만들어 그 위층의 탑신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높은 굄은 2층 이상의 탑신이 지나치게 체감되어 자칫하면 중후해질 것을 우려하여 취해진 구조로서, 이로 말미암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오히려 경쾌감을 더하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5층옥개석 위에 거의 원추형에 가까운 노반석(露盤石) 하나가 있을 뿐 다른 부재가 없으며, 찰주공(擦柱孔)은 노반을 관통하여 그 밑의 옥개석 중심부에까지 패어 있다.

1963년 조사에서 4층 탑신 남면에 두께 13cm의 판석으로 가린 사리공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사리장치는 발견되지 않았다.

특징

이 석탑은 목조탑의 구조를 석재로써 변형하여 표현하고 있는 탑으로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 층 우주에 보이는 배흘림수법, 얇고 넓은 각 층 옥개석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에 나타난 반전, 목조건물의 두공을 변화시킨 옥개석 하면의 받침수법, 낙수면 네 귀의 우동마루형 등에서 그와 같은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현재 상륜부를 결실한 노반석까지의 석재가 149개나 되는 것에서도 이 탑이 목조가구의 번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부수법에 있어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품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의 초층탑신에는 주3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공을 기리는 글이 해서(楷書)로 새겨져 있어서 한때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세련되고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며,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는 백제탑 형식 중 전형적인 석탑이자 석탑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석탑은 각부의 양식수법이 특이하고 본격적인 석탑으로 정착하고 있는 전이적인 규범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 석탑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데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扶餘) 定林寺址』(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1)
『백제계석탑 연구』(천득염, 전남대학교 출판부, 2000)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초기 조사와 탑신 명문에 관하여」(전지혜, 『한국고대사탐구』 28,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8)
「중국 남북조시대의 소조상과 부여 정림사지」(이병호, 『역사문화연구』 66,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8)
「부여 정림사지 가람배치와 편년적 검토」(정자영, 『한국상고사학보』 76, 2012)
「百濟 定林寺址 石塔 下部 軸基部 版築土의 性格」(趙源昌, 『한국고대사탐구』 5, 2010)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구성암석의 원산지 추정」(이찬희외, 『 지질학회지』 43권 2호, 대한지질학회, 2007)
『문화재대관(文化財大觀)』보물(寶物) 2(한국문화재보호협회, 대학당, 1986)
「미륵사탑과 정림사탑」(김정기, 『고고미술』164, 1984.12)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홍사준, 『고고미술』47·48, 1964)
주석
주1

모서리기둥

주2

공포 부재의 총칭

주3

618년에 중국의 이연(李淵)이 수나라 공제(恭帝)의 왕위를 물려받아 세운 통일 왕조. 도읍은 장안(長安)이며,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으나, 안사(安史)의 난 이후 쇠퇴하여 907년에 주전충(朱全忠)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4

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잡은 터에 쌓은 돌. 우리말샘

주5

건축물에서,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이 되는 부분. 우리말샘

주6

탑기단(塔基壇)과 상륜(相輪) 사이의, 탑의 몸에 해당하는 부분. 탑의 중심을 이룬다. 우리말샘

주7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장식이 있는 불탑의 꼭대기 부분. 우리말샘

주8

쓰러지지 않도록 받치는 기둥. 우리말샘

주9

돌 위에 올려놓는 납작한 돌. 우리말샘

주10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 우리말샘

주11

기둥의 중간이 배가 부르고 아래위로 가면서 점점 가늘어지게 만드는 방법. 구조의 안정과 착시 현상을 바로잡기 위한 수법으로, 그리스를 비롯한 한국ㆍ중국ㆍ일본 등의 고대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말샘

주12

공포(貢包) 따위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초방(初枋)을 짜고 그 위에 수평으로 올려놓은 넓적한 나무. 우리말샘

주13

포(包)와 포 사이에 바른 벽. 우리말샘

집필자
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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