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나쁜 병을 얻었을 때 부처와 신에게 빌어 회복되었다. 이후 병든 사람을 위해 힘쓰다가 이지저(李之氐)의 천거로 충렬왕(忠烈王)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1278년(충렬왕 4)에 박항(朴恒)· 김주정(金周鼎)·이지저 등과 함께 이때 처음으로 설치된 필도치(必闍赤: 비칙치)에 임명되었다.
1280년(충렬왕 6)에 왕명으로 현화사(玄化寺)의 불전(佛殿)을 세웠으며, 1281년(충렬왕 7)에 공유(孔愉) 등과 함께 현화사를 수리하고, 남계원(南溪院)· 왕륜사(王輪寺)의 석탑(石塔)을 수리하였다. 이해에 충렬왕이 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하였다. 기인(其人) 50명을 데리고 사사로이 자신의 집에서 사경(寫經)을 제작하다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책망이 두려워 자신의 집을 금자대장사경소(金字大藏寫經所)로 내어 놓았다.
1283년(충렬왕 9)에 국왕과 궁주의 안녕을 기원하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축을 제작, 발원하여 봉안하였다. 1284년(충렬왕 10)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서 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충청도(忠淸道)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었다. 1286년(충렬왕 12)에 「아미타여래도(阿彌陀如來圖)」를 조성하였다.
1287년(충렬왕 13)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가 뒤이어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다. 이해 9월에 제국대장공주의 명을 받고 순군(巡軍)과 홀치(忽赤) 등을 풀어 인가를 수색하여 양가의 딸을 징발함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1291년(충렬왕 17)에 판판도사사(判判圖司事) 세자보(世子保)가 되었다가 뒤이어 판감찰사(判監察事)가 되었다. 1293년(충렬왕 19)에 왕과 공주를 따라 원(元)나라에 다녀왔으며, 1295년(충렬왕 21)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때 대광(大匡)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상장군(上將軍)으로서 인각사(麟角寺) 보각국사普覺國尊) 일연(一然)의 비문 제작에 참여하였다.
1302년(충렬왕 복위4)에 흥법좌리공신(興法佐理功臣)에 봉해지고,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뒤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가사를 입고 숯불을 손바닥 위에 놓고 향을 피우며 염불하였으나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