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서원(瑞原). 초명은 염유직(廉惟直). 정당문학(政堂文學) 염신약(廉信若)의 후손이다.
일찍이 나쁜 병을 얻었을 때 부처와 신에게 빌어 회복되었다. 이후 병든 사람을 위해 힘쓰다가 이지저(李之氐)의 천거로 충렬왕(忠烈王)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1278년에 박항(朴恒)·김주정(金周鼎)·이지저 등과 함께 이때 처음으로 설치된 필도치(必闍赤: 서기직)에 임명되었다.
1281년 자기 집의 일부를 희사하여 대경사경소(大經寫經所)로 삼았는데 그 까닭이 염승익이 승지(承旨)의 권세를 남용하고 기인(其人: 인질로 잡혀 있는 지방 토호세력들의 자제)을 동원하여 큰 저택을 지은 것에 대한 비난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284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서 경상도·충청도도순문사(慶尙道忠淸道都巡問使)가 되었다. 1278년에는 공주의 명을 받고 순군(巡軍: 충렬왕 때 치안과 난을 진압할 목적으로 설치한 군대)과 홀치(忽赤: 왕실 숙위군) 등을 풀어 인가를 수색하여 양가의 딸을 징발함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1287년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가 뒤이어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으며, 1291년에 판판도사사 세자보(判判圖司事世子保)가 되었다가 뒤이어 판감찰사(判監察事)가 되었다. 1293년에 왕과 공주를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295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1302년에 흥법좌리공신(興法佐理功臣)에 봉해지고,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뒤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가사를 입고 숯불을 손바닥 위에 놓고 향을 피우며 염불하였으나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