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6년(충렬왕 12) 작.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203.5㎝, 가로 105㎝. 일본 니혼은행[日本銀行] 소장.
고려의 귀족 염승익(廉承益)이 만약 자신이 임종을 맞이한다면 아미타불을 만나 즉시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조성한 불화이다.
왼쪽 방향으로 발을 딛고 있으면서 오른쪽으로 상체를 돌려 멀리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미타불은 내영(來迎: 부처나 보살이 나타나 극락으로 맞아들임)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활력에 찬 풍만한 얼굴, 근엄한 이목구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개성 있는 얼굴은 노출된 가슴의 풍만함, 신체의 활력과 함께 이 아미타불을 생동감 넘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마의 ︷모양의 특징 있는 표현과 함께 1306년 작 아미타여래도(일본 네즈미술관 소장)보다 앞선 불화임을 잘 말해 주는 것이다.
붉은 바탕에 커다란 금색 꽃무늬가 수놓인 대의는 옷주름의 활기찬 선묘(線描: 선으로만 그림)와 어울려 역동하는 힘을 더한층 고조시켜 준다. 적색 의상의 옷 끝단에 보이는 규칙적인 옷주름 그리고 금색의 구름무늬는 얼굴이나 팔의 살색과 함께 3색의 아름다운 조화를 적절히 보여 주고 있다.
이 그림은 1286년이라는 명확한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불화 양식을 분명히 밝힐 수 있는 고려 불화의 기준 작품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화면 좌우 모서리에 적혀 있는 화기(畫記)는 이 불화의 역사적 의의를 보다 높여 주고 있다.
화기에 의하면 1286년 봉익대부좌상시염□□(奉翊大夫左常侍廉□□)이 자회(自回)로 하여금 이 아미타여래도를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염□□은 충렬왕 당시의 총신(寵臣) 염승익이 확실하다.
그는 이에 앞서 1283년 개경 남계원(南溪院)의 탑과 거기에 넣은 감지금니법화경(紺紙金泥法華經,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봉안하는 등 사경(寫經)을 비롯한 수많은 불사를 행하였다.
따라서 이 그림도 그가 당시의 명화가였으리라고 생각되는 자회로 하여금 자신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뜻에서 조성한 불화임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고려 불화의 귀족적 성격이 분명히 나타나 있는 당시 최고의 걸작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