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과 가계는 자세하게 알 수 없으며 출신지는 예안현(禮安縣)이다. 충렬왕이 태자로서 원에 들어가 있을 때 충렬왕을 시종하였으며, 원 간섭기 때 사전(賜田)을 많이 받고 백성들을 전호(佃戶)로 만든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내료(內僚)로 벼슬을 시작했으며, 1278년(충렬왕 4)에 필도치[必闍赤]에 임명되었다.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준비할 때 전쟁에 나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장군 직책을 사직하기를 청원하였다. 충렬왕이 마제산(馬提山)으로 사냥을 가 대궐로 돌아갈 것을 잊을 정도로 사냥 재미에 빠지자, 사냥터의 말이 곡식을 짓밟아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다고 왕을 설득하여 왕이 대궐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아울러 왕이 민간의 집비둘기를 빼앗아 궁중에 바치도록 한 것도 되돌려 주도록 간언하였다.
1292년(충렬왕 18)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에는 원나라에서 합포등처 진변만호부 부만호(合浦等處鎭邊萬戶府副萬戶)로 임명되었다. 1304년(충렬왕 30) 여러 관직을 거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로 승진하였으며, 합포(合浦)로 나가 진수(鎭戍)하였다. 충선왕이 즉위한 후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 상의식목도감사(商議式目都監事)에 임명되었다. 1317년(충숙왕 4)에 사망하였다.
1282년(충렬왕 8)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이후 1311년(충선왕 복위3)에는 먼저 예안군(禮安君)으로 봉해졌다가 후에 승안군(承安君)으로 바뀌어 책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