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제신(廉悌臣)은 고려 후기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 영삼사사(領三司事),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고려와 원을 오가며 관직 생활을 했던 관료이다. 1302년(충렬왕 30) 출생하여 원(元) 평장사(平章事)인 고모부 말길(末吉)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충숙왕 대에 정동행성 관원으로서 고려에 와서 충숙왕의 신임을 받았고, 공민왕 대에는 고우성(高郵城) 공격을 위한 고려군을 이끌었으며, 공민왕 5년 개혁 당시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원의 공격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1382년(우왕 8)에 사망하였다.
염제신의 본관은 서원(瑞原), 자는 개숙(愷叔), 처음 자는 불노(佛奴이다).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지낸 염승익(廉承益)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감문위대호군(監門衛大護軍) 염세충(廉世忠)이다. 어머니는 조인규(趙仁規)의 딸이다. 첫 번째 부인인 완산군부인(完山郡夫人) 배씨(裵氏)는 찬성사 완산군(贊成事 完山君) 배정(裵挺)의 딸로, 자식이 없이 일찍 죽었다. 두 번째 부인인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권씨(權氏)는 권한공(權漢功)의 딸이다. 3남 5녀를 낳았다. 아들은 염국보(廉國寶) · 염흥방(廉興邦) · 염정수(廉廷秀)인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첫째 딸은 홍징(洪徵)에게, 둘째는 임헌(任獻)에게, 셋째는 정희계(鄭熙啓)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넷째 딸은 공민왕의 비인 신비(愼妃)이며, 막내딸은 이송(李悚)에게 출가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원(元) 평장사(平章事)인 고모부 말길(末吉)의 집에서 자랐다. 태정황제(泰定皇帝)를 시종하여 총애를 받다가 고려에 들어와 어머니를 만나 보고, 다시 원으로 건너가 상의사(尙衣使)가 되었다. 1333년(충숙왕 복위 2), 다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귀국을 요청해 정동성낭중(征東省郎中)에 임명되어 돌아왔다. 염제신은 동료들의 횡포를 억제하는 한편, 토지와 노비의 소송은 모두 관계 당국에서 처리하도록 하여 충숙왕(忠肅王)의 신임을 받았다. 충숙왕 사후, 다시 원으로 가서 익정사승(翊正司丞)이 되었다. 뒤이어 절강성(浙江省)에 가서 중정원(中政院)의 돈과 재화의 회계를 감사하며, 관리들이 뇌물을 주어 매수하려 하는 것을 모두 물리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은 원 순제(順帝)가 특별히 등용하려 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다시 귀국하였다.
충목왕(忠穆王) 때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임명되고 수성익대공신(輸誠翊戴功臣)으로 봉해졌다. 뒤이어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가 되었고, 1349년(충정왕 1)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하정사(賀正使)로 원에 갔다.
1354년(공민왕 3)에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가 곧 우정승(右政丞)이 되었다.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에 봉해지고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이 되었다. 그때 원에서 난을 일으킨 고우성(高郵城)의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기 위해 고려의 군대를 요구하니, 염제신이 유탁(柳濯) 등과 함께 군사 2,000명을 이끌고 원나라에 갔다가 그해 10월에 공민왕(恭愍王)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 기철(奇轍) 일당을 숙청한 뒤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가 되어 원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을 겸하였다. 1358년(공민왕 7)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으며, 1361년(공민왕 10)에 관직과 명망이 최고위에 이르자 사직하였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1363년(공민왕 12)에 우정승이 되었으나, 홍건적의 난 때 어머니를 버리고 피난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신(告身)에 서경(署經)되지 못하고 파면되었다. 김용(金鏞)이 처형당하자 김용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364년(공민왕 13)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가 되었을 때, 신돈(辛旽)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으나,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는 않았다. 1371년(공민왕 20)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정벌할 때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가 되어 이기고 돌아와 곡성백(曲城伯)에 봉해졌다. 그해 딸이 공민왕의 비인 신비(愼妃)로 책봉되었다.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고, 곧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가 되었으며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에 봉해졌다. 1379년(우왕 5)에 세워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에는 혜근(惠勤)의 입적 후 제자들이 진영당(眞影堂)을 짓고 석종을 만들어 사리를 봉안하면서 그 비문을 신륵사에 자주 드나들던 염제신을 통해 이색(李穡)에게 부탁하여 짓게 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이색이 쓴 신도비가 있고,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그의 초상화가 있다.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수현사(水鉉祠)에 염제신과 아들 염국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