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0년(충숙왕 7) 경상도 영해부(寧海府)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아(牙)씨, 속명은 원혜(元惠), 법명은 혜근, 법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아버지 아서구(牙瑞具)의 벼슬은 선관서령(膳官署令)이었고, 어머니는 영산군 사람 정씨(鄭氏)이다. 1376년(우왕 2)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20세 때인 1339년(충숙왕 복위 9) 문경 공덕산(功德山)에 가서 요연선사(了然禪師)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5년 뒤인 1344년(충목왕 즉위년)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머물며 4년간 수행하다 원나라로의 유학을 결심했다. 1347년(충목왕 3) 28세로 유학을 떠나 1358년 귀국할 때까지 원에 머물며 수행했다. 1348년 원나라 대도(大都)에 도착한 혜근은 대도의 법원사(法源寺)에서 지공(指空)을 만나 1350년까지 수학하였다. 1350년 음력 3월 대도를 떠나 뱃길로 중국 강남 지역으로 내려가 1353년 3월 대도 법원사로 돌아갈 때까지 3년간 항주(杭州), 명주(明州), 무주(婺州) 등 중국 강남 지역을 다니며 임제선승을 만나 수행하였다. 정자사(淨慈寺)의 평산처림(平山處林), 아육왕사(阿育王寺)의 설창오광(雪窓悟光), 복룡산(伏龍山)의 천암원장 등을 만났다. 1353년 3월 다시 대도로 돌아와 지공에게서 법의와 불자, 전법게 등을 받았다.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광제선사(廣濟禪寺)에도 주석하고, 무학자초(無學自超)를 제자로 받는 등 대도 지역에서 활동하다 1358년(공민왕 7) 귀국하였다.
1360년(공민왕 9) 오대산에 머물며 환암혼수(幻庵混脩)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공민왕의 지지와 후원으로 불교계에서 활동하였다. 혜근은 공민왕의 명으로 궁궐에서 설법한 뒤 해주 신광사(神光寺) 주지가 되었다. 1267년(공민왕 16) 왕명으로 청평사 주지가 되었고,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천도를 위한 수륙재도 주관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지공의 사리가 고려에 도착하자 회암사에 지공의 사리를 봉안하는 불사도 담당하였다. 1370년 음력 9월 16~17일 공민왕의 명으로 광명사(廣明寺)에서 개최된 공부선의 주맹을 맡았으며, 이듬해 왕사로 책봉되고 송광사 주지에도 임명되었다.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의 후원을 받으며 회암사 중수를 시작하였으나 1376년(우왕 2) 회암사 낙성식 이후 사헌부와 도당(都堂)의 탄핵을 받아 밀양으로 내려가던 중 입적하였다.
혜근은 10년여의 유학 기간 동안 대도 불교와 강남 불교를 모두 경험했고, 지공과 평산처림의 법통을 계승하여 이중적 법통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혜근의 스승인 지공은 고려에서 석가모니의 후손으로 존숭받았는데, 혜근이 이러한 지공의 법통을 계승한 것은 혜근의 위상을 높이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혜근 불교의 특징은 “축도지규방할지풍(祝禱之規棒喝之風)”이라는 문도의 말로 요약된다. '축도지규'는 축성의식(祝聖儀式)을 중심으로 하는 청규(淸規)의 실천을 말하며, '방할지풍'은 혜근 선풍의 핵심이 임제선에 있음을 의미한다. 혜근의 선은 공부선에서 제시한 삼구(三句)와 삼전어(三轉語)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혜근은 선정일치(禪淨一致)에 입각한 유심정토(唯心淨土)를 견지하면서도 화두염불법( 話頭念佛法)을 제창하였다. 제자로는 환암혼수, 무학자초 등 2,000여 명이 있으며, 저서로는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1권과 『가송(歌頌)』 1권이 전한다.
혜근은 입적 후 국사로 추존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혜근의 문도들은 여러 지역에서 혜근에 대한 추모와 현창을 이어 나가 1384년(우왕 10) 무렵까지 성행하였다. 제자들의 혜근 현창으로 어록 간행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 부도와 진당(眞堂)이 조성되었다. 1376년 신륵사에서 다비를 마친 뒤 혜근의 영골 중 일부가 회암사에 마련된 부도에 안장되었고, 우왕은 혜근에게 선각(禪覺)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으며, 이색에게 비문을 짓게 하여 1377년 회암사에 비석을 조성하였다. 1379년에는 어록을 간행하고, 혜근의 입적처인 신륵사에는 석종처럼 생긴 부도를 만들어 정골(丁骨) 사리를 봉안하고 진당을 세웠다. 또한 금강산, 치악산, 소백산, 사불산, 용문산, 구룡산, 묘향산 등 일곱 곳에 윤필암(潤筆庵)을 세웠고, 금강산 정양사, 회암사, 신륵사, 오대산, 견암, 위봉사, 광법사, 보현사 등에는 혜근의 가사와 발우 등을 봉안하였다. 그 밖에 안심사(安心寺)에 석종을 만들어 혜근의 두골과 사리를 봉안했고, 1388년(우왕 14)에는 원주 영천사(靈泉寺) 석탑에 혜근의 사리를 봉안하였다. 혜근 입적 후 전개된 현창불사는 혜근 문도들의 결속력뿐만 아니라 그들의 위상과 역량도 높여 주었다. 이색 및 이색의 문도와 친교를 나누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조선 전기까지 나옹의 문도들이 불교계를 주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건국 후에는 혜근의 제자인 무학자초가 1393년(태조 2) 광명사에 혜근의 진영을 봉안했고, 이듬해에는 회암사를 중심으로 혜근을 추숭하며 임제선법이 혜근을 거쳐 자신에게 계승되었음을 정리한 조파도(祖派圖)를 만들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조원통록촬요(祖源通錄撮要)』에서처럼 혜근을 석가의 후신이라 하며 생불(生佛)의 차원에서 숭배하는 모습도 보인다. 17세기에는 조선 후기 불교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허균(許筠)이 나옹을 주류에 둔 나옹법통설(懶翁法統說)을 제시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법통설은 결국 태고법통설(太古法統說)을 공식화하며 정리되었으나 지공, 무학과 함께 삼화상(三和尙)이라 불리며 의성 대곡사나 양산 통도사에서 보듯 그림으로 그려져 전각에 봉안되기도 했다. 또한 불교 의례에서 증명삼화상(證明三和尙)으로 추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