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륙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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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례. 불교의식.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수륙재는 불교에서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례 행위이다. 중국 양무제는 떠도는 영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했다. 이에 의식문을 만들어 505년 금산사(金山寺)에서 수륙 도량을 베푼 것이 시초이다. 우리나라는 970년(고려 광종 21)에 갈양사에서 개설한 것이 최초이다. 오늘날 전래되고 있는 수륙재의 의문(儀文)은 『범음집』, 『천지명양수륙재의문산보집』, 백파(白坡)의 『작법귀감』, 『석문의범』 등에 실려 있다.

목차
정의
불교에서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례. 불교의식.
내용

이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불교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던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 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음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에 의하여 불교의식이 유교의식으로 많이 바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태조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하여 크게 재의를 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의식의 유교화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시키지는 못하였다.

억불(抑佛)로 이름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하였다. 처음에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하였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됨이 없이 계속되었다.

왕실이 직접 그 시주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를 열게 됨에 따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 밖에서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 때에는 양반 · 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에 의해 수륙재가 국행으로 거행됨이 금지되었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수륙재의 의문(儀文)은 『범음집(梵音集)』 속에 포함된 「수륙재의문」 · 『천지명양수륙재의문산보집(天地冥陽水陸齋儀文刪補集)』, 백파(白坡)『작법귀감(作法龜鑑)』에 수록된 「수륙재의문」, 『석문의범(釋門儀範)』 중 「수륙재의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석문의범』에서의 의식절차는 앞의 세 가지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그 취지는 대체로 같다. 이 『석문의범』에서는 「수륙무차평등재의(水陸無遮平等齋儀)」라 하였는데, 그 뜻은 모든 영혼을 평등하게 천도받게 한다는 뜻이다.

그 절차를 보면, ① 먼저 재를 여는 취지를 밝히고, ② 영혼이 불보살로부터 설법을 들을 수 있도록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게 하며, ③ 명부사자를 맞이하기 위한 분향(焚香) 의식을 한다. ④ 다음 명부사자를 초청하여 공양하고 축원을 봉송한다. 이 의식은 문 밖에서 행한다.

⑤ 다시 재의도량이 청정도량이 되게 오방신(五方神)에게 공양하며, ⑥ 명부사자를 대접해 보내고 의식도량을 청정하게 한 다음 불법승 삼보(三寶)에게 공양드린다. ⑦ 다음 호법제선신중(護法諸善神衆)인 천(天) · 팔부신장(八部神將) · 용왕 등을 청하며 공양을 드린 후 비로소 불교의 정법신앙인 삼보를 의식도량에 청하여 공양하고 불단(佛壇)에 모시게 된다.

⑧ 이 때 천도의 대상인 영혼을 청하게 되는데, 우선 불보살 앞에 나아가기 전에 조욕의식(藻浴儀式)을 행한다. 먼저 몸을 청결히 하고 다시 법의 뜻을 지닌 새 옷을 갈아입는 의식을 행한 다음 비로소 불보살께 고혼의 공양을 올림으로써 불보살의 가호를 받아 구제받게 된다.이렇게 해서 구제받은 유주무주의 고혼은 불법에 귀의하여 다보여래(多寶如來) 등 5여래의 성호를 선양하게 된다는 것이다.

⑨ 이후 고혼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의식이 펼쳐지는데, 이 때의 음식은 모두가 법식(法食)으로 변하게 된다. ⑩ 마지막으로 참회와 사홍서원(四弘誓願)이 펼쳐지는데, 이 때 고혼은 올바른 불제자가 되어 비로소 구제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진행절차는 모두 끝난다. 이 수륙재의 진행방법을 살펴보면, 매우 예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잘 다듬어지고 시적인 내용을 지닌 의식문뿐만 아니라, 그 의식문은 범패라고 하는 불교음악으로 창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반주악기로서 태징 · 목탁 · 요령 · 등이 따르게 되고, 의식의 중요한 부분에 이르면 불교의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의식무용이 곁들이게 된다.

설단(設壇)의 양식을 살펴보면, 이 수륙의식이 불보살 이외에 다신교적인 신앙의 대상을 의식도량에 끌어들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러 신앙의 대상을 의식도량에 끌어들여서 궁극적으로는 불보살의 신앙으로 통섭되고 만다는 밀교적인 지혜가 작용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수륙재의 수륙은 여러 신선이 흐르는 물에서 음식을 취하고, 귀신이 깨끗한 땅에서 음식을 취한다는 뜻에서 따온 말이므로 청정한 사찰 또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행하여도 무방하다. 그러나 오늘날 수륙재를 모두 강변이나 해변가에서 해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음은 수륙의 ‘수(水)’자만의 뜻을 취하여 방생재(放生齋)와 혼동하고 있는 데서 온 오류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양촌집(陽村集)』(권근)
『천지명양수륙재의문산보집(天地冥陽水陸齋儀文刪補集)』
『지반문(志磐文)』
『범음집(梵音集)』
『작법귀감(作法龜鑑)』
『석문의범(釋門儀範)』
『韓國佛敎儀禮の硏究』(洪潤植, 隆文館,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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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홍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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