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패는 불교 의식에서 범패승이 창화하는 의례문 율조이다. 석가모니의 설법 음성을 원음으로 하는 범음이 중국에 이르자 범어(梵語)와 한어(漢語)의 율이 맞지 않아 조식(曹植)이 어산 범패를 창제하였다. 당대(唐代)에 이르러 도안(道安)에 의해 의례 율조가 강화되며 수행자들의 일상 전반에 율조가 수반되었다. 진감 선사는 당(唐)에서 범패를 배워와 가르쳤다. 고려조에 원나라를 통해 유입된 티베트 방식이 일부 섞이게 되고 조선조 억불로 인해 불교 의례가 민간화되면서 토착화가 심화되어 한국 고유의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범패는 석가모니 붓다의 설법 음성에서 시작되어 어조에 따라 율조 유형이 생겨났고, 전파되는 지역의 옷을 입고 정착되었다. 범패의 梵(범)은 산스크리트어 브라흐마(brāhma)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천상의・영적인・신성한 등의 형용사적 의미와 말씀・경전・문구 등의 명사적 의미가 있다. 패(唄)는 산스크리트어 독송・암송을 뜻하는 파타(pāṭha)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찬팅(chanting)과 관련이 있다.
붓다 입멸 후 스승의 말씀을 합송하여 빠알리(경전어라는 뜻) 경전이 성립되었다. 석가모니의 설법어였던 마가다어는 문자가 없어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붓다 입멸 후 450년(BC 1세기)에 스리랑카에서 싱할라어로 음을 베껴 기록한 것이 최초이다. 빠알리 경전의 율조는 서술형으로 된 숫다, 법구경과 같이 시(詩)형으로 된 가타, “이렇게 말씀하셨다”로 시작되는 이티부타카 등 9가지가 있다. 이들은 전파되는 지역의 언어로 음사(音寫)되어 신할리즈, 미얀마, 동남아 원주민의 캄마, 태국, 인도의 데바나가리(Dēvanagari), 몽골, 그리고 로마나이즈의 7가지가 있다. 이들은 빠알리를 소리나는 대로 음사한 것이므로 음사된 문자의 본래 뜻과 무관한 ‘음성경전’이다.
산스크리트와 빠알리의 관계를 보면 성문어인 산스크리트가 속어인 빠알리에 비해 문법 체계가 좀 더 정교하다. 발음의 차이를 보면, 산스크리트는 법(法)을 ‘다르마’, 빠알리는 ‘담마’라고 하는 정도이고, 근본적인 언어 체계는 동일하다. 예를 들어, ‘알다. 깨닫다’의 어원 ‘부드(Budh)’에서 깨달은 자 ‘붓다(Buddha佛)’, 붓다의 가르침 ‘보디(Bodhi法)’, 가르침을 따르는 ‘바우다(Bauddha僧)’가 형성되는 어휘 변화를 보면, 붓다(Buddha)의 ‘u’는 1차 순수 모음, 보디(Bodhi)의 ‘o’ 는 a와 u가 혼합된 2차 모음, 바우다(Bauddha)의 ‘au’는 ‘o’에 ‘a’가 더해진 3차 모음으로, 소릿값에 따라 의미와 가치 변화가 있다.
붓다 입멸 후 400년경(BC 2세기) 인도 건타라국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재위 73~103) 시기에 산스크리트 합송에 의한 경전이 성립되었다. 이를 남방 불교에서는 인정하지 않았고, 북방으로 전파되었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해진 실담(悉曇) 범어는 인도 북부의 산스크리트어였다. 중국 사람들은 실담 자모(알파벳)를 한문으로 음사하여 경전에 실었다. 한글 가나다라와 같이 실담 자모 아라파차를 반야경을 비롯한 각 경전에 실으며 자모(字母, 알파벳) 한 자 한 자에 각 경전이 추구하는 사상과 덕목을 대입하였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화엄경』에 실린 42자모이고, 오늘날 중국 범패 중 가장 장엄하게 창화 되는 화엄자모찬이다.
모음의 장단에 의해 율조가 형성되는 범어와 달리 한어는 뜻 글자를 쓰는데다 범어는 고저승강(高低乘降)의 4성조인 한어와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위나라 조식(曹植 192~232)이 한어(漢語) 범패를 창제하였는데, 이때는 대부분의 경전이 번역되기 전이었다. 뜻이 있는 경구나 가타는 한어 범패로 전환되었으나 진언과 다라니는 본래의 음과 율조를 지니고 공존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한어 범패 율조로 동화되어 갔다. ‘옴마니반메훔’을 육성(六聲) 내지 육음(六音)대명주라고 하지 않고 ‘육자(六字)대명주’라고 하는 것도 중국에서 자의화(字義化)된 범패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역경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당대(唐代)의 역장(譯場)에는 번역문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는 증의(證義)부터 윤문에 이르기까지 10분야의 전문가가 있었는데, 그중에 번역문을 낭독하기 좋도록 하는 범패사(梵唄師)가 반드시 있었다. 도안(道安 314~385)은 승려들이 승가에서 지켜야 할 규범과 일상의 의례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창송・ 도량・참(懺) 법회 등을 제정하고 전독・게찬・의례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도안이 정한 승려 규범과 조항은 행향(行香)・정좌(定座)・독경법〔上經上講之法〕을 비롯하여 일상에서 예를 올리는 규범〔行道飮食唱時法〕까지 적용되어 수행자의 모든 일상에 율조가 수반되었다. 도안의 창송 규정이 후세 승단 수행의 전형적 모범이 되어 패찬의 의례화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고, 이들은 오늘날 중국과 대만의 조석 예불과 연중 법회로 이어지고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불교를 공인했다는 것은 그 이전에 불교가 유통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기독교 찬송가가 성경 율조와 별개인 것과 달리 불교는 경전 그 자체의 율조가 범패였던 만큼 독경・진언・다라니에 의한 율조가 이미 들어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경덕왕 19년(760년)에 월명사가 성범(聲梵) 대신에 “향가로 도솔가를 지어 불렀다.”라는 『삼국유사』 기록은 진감 선사가 당풍 범패를 배워 오기 전이었다. 따라서 월명사가 부르지 못한 성범은 외래의 율조이고, ‘범(梵)’이라는 글자에 미루어 범어 범패였을 가능성이 높으나 진감 선사 이전에 일부 들어와 있던 중국풍 범패였을 가능성도 있다.
진감 선사(774850)는 흥덕왕 5년(830)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이후 지리산 옥천사에서 범패를 가르쳤고, 정강왕(863887) 대에 이르러 옥천사의 양편에 계곡이 있어 쌍계사로 개명하였다. 진감 선사가 수학하던 시기 당나라는 송경 율조와 더불어 도안에 의한 패찬 의례 율조가 있었고, 속강(俗講)과 창도사(唱導師)의 노래까지 있던 시기였다. 진감 선사가 이 모든 장르를 다 섭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여 년의 유학 기간에 미루어 볼 때, 제반의 율조들을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단 오늘날 중국과 대만의 대표적인 범패 장르인 찬(讚)은 명・청대에 제정된 것이므로 이러한 율조는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려대장경』에는 한역 경전과 더불어 진언과 다라니도 함께 편재되어 있고, 균여 대사가 지은 보현십원가에 미루어 볼 때, 고려조의 범패는 범어(범풍)・한어(당풍)・향가(향풍) 범패의 세 가지가 향유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불교는 원나라 간섭기에 티베트 불교가 유입되면서 변화를 겪었다. 오늘날 재장에 괘불을 내어 걸고 승려들이 태평소를 부는 것은 중국에는 없는 방식이다. 또한 굵고 탁한 발성을 구사하는 경제 짓소리와 같은 범패도 중국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를 반영하듯 고려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신라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영남 지역에는 태평소를 부는 승려나 격한 표출력의 짓소리가 없다.
고려조의 풍속이 남아있던 조선 초기에는 불교에 의한 기우제, 경행(徑行) 및 소재(消災) 의식이 열렸고, 국행 수륙재가 행해지면 북과 종소리가 천지를 울릴 정도였다. 그러나 중기로 접어들면서 도성 안의 사찰이 폐사되었고, 승려는 도성 출입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제반 의례가 민간 주도로 행해지며 민속화(民俗化)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불교의식과 무속이 혼재되며 범패의 토착화가 심화되었다. 굿판에서 오방신장과 함께 부처와 보살을 청하고, 불교의 도량게로 굿의 터 닦음을 하는가 하면, 축귀경(逐鬼經)과 함께 천수경, 회심곡을 염불무가로 노래하다가 마침내 세존굿, 제석굿이 생겨났고, 재장에서 부르는 회심곡은 무가(巫歌)의 청배 장단으로 노래하게 되었다.
화청은 ‘지심걸청(至心乞請)’으로 시작하여 참여자들을 청하는 범패인데 회심곡류 노래를 화청이라 하여 혼란이 있었다.
비슷한 예로, 일본의 ‘화찬’은 일본어 가사에 민요조 선율이라 얼핏 보면 회심곡과 유사하지만 화찬은 종조와 종지(宗旨)를 찬탄하는 가사로 『과송집』과 의례문에 편재되어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회심곡류 노래들은 의례문과 별개로 송대에 유행한 부모은중경류의 가사와 한국의 고승들에 의한 이야기체 노래가 한국식으로 정착된 것이므로 범패 화청이나 일본의 화찬과는 다른 장르이다. 반면 한국의 조사들이 지은 경문찬초(經文纂抄)나 축원문은 한글로 쓰여지지 않았지만 당풍 범패와는 결이 다른 향풍 범패이므로 이들에 대한 변별력이 필요하다.
한문 가사는 한 글자만으로도 뜻의 전달이 가능하므로 시체(詩體)는 무박절법의 멜리스마 선율로 길게 늘여 짓고, 사설 조 의례문은 일자 일음으로 촘촘히 짓는다. 이에 비해 모음의 장단 배열에 의해 율조가 형성되는 범문 진언과 다라니는 여러 법구를 타주하며 리듬 절주가 부각된다. 또 다른 범패의 분류 방법 중에는 바깥채비와 안채비가 있다. 바깥채비란 외부에서 전문 범패승을 불러온 데서 지어진 이름이고, 안채비는 사찰 주지를 비롯한 내부 승려가 하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러나 재장의 실제 상황을 보면, 바깥채비 승려들이 자신들의 사찰에서 모든 범패를 다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러한 설명이 무색해졌다.
의례 설행과 범패 율조의 관계를 보면, 상단( 영산작법)에 불리는 지심신례, “삼각원 만덕구”로 시작하는 불찬, 진언 중에도 상단 헌좌진언 같은 경우는 시(詩)가 아닌데도 길게 늘여 짓고, 중단, 하단으로 갈수록 모음의 길이가 짧아지므로 창송 대상의 지위나 품격에 따라서도 율조의 장엄이 달라진다. 짓소리는 모음을 늘여 짓는 사구성(四句聲)에 탁하고 저음으로 짓는 발성을 합송하는 것이고, 독소리에다 모음 장인과 발성을 단촐하게 짓는 경우 홑소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 선율은 의식의 여건에 따라 견기이작(見機而作)하므로 짓소리와 홑소리를 넘나드는 유연성과 즉흥성이 있다.
범패의 선율은 동부 민요의 특징인 메나리토리가 지배적이다. 이는 동부 지역 경주가 도성이었던 통일신라 시기에 범패가 시작된 데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다니는 승려들의 수행 풍토에 의해 통일된 율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울・경기 지역의 경제는 메나리토리 바탕 위에 경토리와 서도토리의 성격이 다소 있고, 호남 지역의 완제는 경제와 대동소이하나 세 지역에 비해서 메나리토리 성격이 가장 옅은데, 이는 남도토리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경남 지역의 영제는 메나리토리에 가장 충실하며, 여타 지역과 확연히 다른 고유의 성역을 지니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의 범패는 제반의 신행 율조를 포함하지만 한국에서는 재장에서 전문승에 의해 불리는 율조를 범패로 지칭하고 있다. 이는 조선조 억불의 영향으로 일부 승려들에 의해서만 범패가 전승되어 온 결과이다. 한편 일본은 헤이안 중기까지는 의례 율조를 ‘범패’라고 하였으나 헤이안 말기에 음성행법을 뜻하는 사브다비드야(Śabda聲 Vidya明), 즉 쇼묘〔聲明〕로 의례 율조를 통칭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일본 청익승들이 당나라에 수학할 때 밀교가 유행하였으므로 이를 배워온 구카이〔空海〕와 사이쵸〔最澄〕에 의해 밀교적 의례 작법으로 변화된 요인이 있다.
조선조 억불로 인해 범패 승단은 사대문 안에 있을 수가 없어 서쪽 교외 백련사의 만월스님과 동쪽 교외 영도사(현 개운사)의 만월스님 문하에 여러 승려들이 활동한다 하여 서만월, 동만월이라는 말이 있었다. 예전부터 어느 사찰에서 재를 하면 다들 모여 와서 함께 지냈으므로 동교・서교는 파벌이나 율적 차이보다 사찰이 있는 지역을 의미했다. 해방 이후 동교의 개운사는 의례의 간소화를 주장한 조계종이 되었으므로 태고종인 서교의 봉원사로 범패승들이 모여들었다. 미성으로 재장에서 명성이 높았던 송암스님은 짓소리 15곡과 일체의 홑소리와 안채비소리를 전승한 데다 후학 양성에도 적극적이어서 영남 지역을 제외한 전국의 범패 스승으로서의 입지가 형성되었다.
짓소리는 본래 72곡이 있었다 하나 1960년대 말 송암스님이 15곡의 짓소리를 완창하였고, 2021년도에 구해스님이 14곡을 가르친 바 있다. 짓소리는 ‘인성(引聲)’소리가 대표적이고, 나머지 짓소리도 인성을 할 줄 알면 가능하다 할 정도로 상통하는 소릿길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재장에서 창화되는 짓소리는 ‘지심신례’ ‘삼각원 만덕구’로 시작하는 불찬(관용적으로 삼귀의소리라고 함), 관욕게 정도이고, 홑소리도 줄여서 하는 경우가 많다. 안채비소리는 유치성, 편게성, 착어성, 게탁성의 4성이 있으나 실제로 이들이 그대로 지켜지는 경우가 드물다. 통도사와 범어사 승려들에 의한 통범소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영남 범패는 평성・상성・거성・입성으로 선율을 짓고, 안채비소리에 경제와 같은 4성은 없다. 1969년도에 녹음된 《영남범패》에는 ‘지심신례’, ‘삼귀의소리’, ‘연향게’에 음소리, 아아훔소리까지 있는 영남 짓소리가 있으나 오늘날 영남 재장에서는 이런 소리를 듣기 어렵다.
1960년대부터 전통문화의 가치와 보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형성되어, 1972년 부산 범어사 용운스님이 부산시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73년 봉원사 영산재의 운공, 벽응, 송암스님이 중요 무형 문화재 범패 보유자로 지정된 이후 전국 각지에 영산재 보존회가 생겨났다. 2014년 삼화사・진관사・아랫녘 수륙재가 국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데 이어 근년에는 예수재에 대한 문화재 지정이 확산되며 전국 각지에 범패승단이 생겨나고 있다. 전통적으로 총림의 염불원을 통해 범패 전승이 이루어졌으나 일제 사찰령에 의하여 염불원이 폐지된 이후 서울・경기 지역 승려들은 봉원사 옥천범음대학과 1980년대 초 조계종 개운사에 새로 문을 연 조계종어산작법학교, 서울 가양동 홍원사의 의례 전승원, 근래에는 경기도 봉선사 염불원을 비롯한 몇몇 대찰에서 염불원을 복원하고 있고, 각 지방에는 “......보존회”를 통하여 범패와 의례 악가무가 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