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는 개신교 예배에서 신을 찬양하거나 신앙심을 키우기 위해 부르는 종교 음악이다. 찬미가, 찬양가, 복음가라고도 한다. 한국 최초의 찬송가는 감리교회 선교사인 존스와 로스와일러가 간행한 『찬미가』(1892)로 악보 없이 가사만 적어 놓은 것이었다. 1894년 언더우드는 가사와 악보가 함께 들어 있는 『찬양가』를 간행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일본 황실에 모독된다는 이유로 찬송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1946년 각 교파들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총 586장의 『합동 찬송가』를 간행하였다. 2006년부터는 총 647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21세기새찬송가』를 사용하고 있다.
찬양가(讚揚歌) · 찬미가(讚美歌) · 복음가(福音歌) 등으로도 불린다. 찬송가는 이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한국의 찬송가는 한국 근대음악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신문학운동, 특히 신시운동(新詩運動)에도 많은 자극을 주었다.
한국 최초의 찬송가는 감리교회 선교사인 존스(Jones,G.H., 趙元時)와 로스와일러 (Rothweiler,L.C.)가 공동 편집한 『찬미가』(1892)로서 악보 없이 가사만 적어 놓은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서북지방에서는 장로교의 백홍준(白鴻俊) 등이 중국어 찬송가를 번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고 하나 그 간행 · 보급의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1894년 북장로교의 선교사인 언더우드(Underwood,H.G., 元杜尤)는 가사뿐만 아니라 악보도 함께 들어 있는 『찬양가』를 편집 · 간행하였는데, 이것은 최초의 곡조 찬송집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는 인간이 지은 죄의 심각성,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치른 대속적(代贖的)인 죽음, 그에 대한 속죄 경험과 그로 인한 기쁨 등이 강조되어 있다. 이 『찬양가』는 서울지방에서만 사용되다가 공인 찬송가로 출간된 것이 1895년에 발간된 『찬송시』이다.
반면 침례교 선교사였던 펜위크(Fenwik,H.C.)는 1912년 펴낸 『복음찬미』를 통해 단지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노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언더우드의 『찬양가』 전 117장 중에는 7장의 한국인 작사 노래가 들어 있는데, 백홍준의 것만이 확인되고 있다. 감리교회에서는 1895년 별도로 『찬미가』를 간행하여 사용하였는데, 대부분 중국어와 영어를 번역한 가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국인이 작사한 것은 한 곡 뿐이다.
최초의 자발적 · 토착적 찬송가로는 1905년 윤치호(尹致昊)가 편집한 『찬미가』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윤치호의 찬미가는 애국송과 황제송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는데다, 감리교회의 공인을 받지 못해 공교회에서 정식으로 사용되지는 못했다.
초기 찬송가들은 외국가사를 그대로 번역하여 수와 길이만 맞추어 편찬하였기 때문에 그 구성이 유치하고 표현이 거칠었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점차 부각되면서 생경한 번역투가 아니라 보다 문학적으로 세련되고 감정에 직접적인 호소력을 지닌, 한국인들의 신앙경험에서 우러나온 찬송가가 요청되었다.
1908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총 266장의 『찬송가』를 예수교서회에서 발행하였다. 가사의 문학적 세련도가 현저하게 높아졌으며, 우리나라 고유의 가락으로 부를 수 있는 찬송가가 다섯 곡 실렸다.
이 『찬송가』 1931년 『신정 찬송가』가 나올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것은 인도자가 먼저 한줄을 노래하면 회중이 그 말과 곡을 반복하고, 둘째 줄로 옮겨가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정 찬송가』는 그 편집과 발행과정에서 나타난 몇 가지 문제점으로 인하여 장로교가 사용을 거부하여 감리교만이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일제 말기에 총독부는 일본황실에 모독된다는 이유로 하나님에 관한 찬송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고, 시오니즘(Zionism)적 색채가 있는 것, 선민의식을 고취하는 찬송가를 금지시켰다.
8·15광복 후인 1946년 각 교파들은 합동 찬송가 사용에 뜻을 모으고 회합을 가지기 시작하여 1949년에는 장로교 · 감리교 · 성결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총 586장의 『합동 찬송가』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장로교회에서는 번역 등의 문제로 일부 수정을 가하였고, 장로교에서 분립된 고려파에서는 예전의 『신편 찬송가』를 그대로 사용했다. 1959년 장로교회가 다시 합동파와 통합파로 나누어지게 되자, 합동파에서는 고려파와 함께 찬송가 편집사업을 결의하고, 1962년 총 671장의 『새찬송가』를 발행하여 그들 나름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기독교장로교 · 감리교 · 예수교장로교(통합), 그리고 성결교회에서는 기독교연합회 주관으로 『합동 찬송가』의 개편을 결의하고, 1963년부터 그 작업에 착수하였다.
개편의 원칙은 중첩된 것의 단일화, 국가 및 민요 형태의 곡조와 가사의 재검토, 종류별 편찬에 유의, 예배용 찬송의 보강, 특정 예배나 절기용 찬송의 보강, 한국 가사나 곡조의 보강을 통한 토착화의 지향, 교독문의 보충, 가사의 전면적 검토 등이었다. 이러한 원칙들을 근간으로 하여 한국인 작사 · 작곡 27편을 포함한 총 600장의 『찬송가』가 1967년에 간행되었다.
또한, 1977년에는 한국 개신교 전체가 공동으로 사용할 『통일 찬송가』의 준비위원회가 만들어져 보수 · 진보의 양진영 교파를 포괄한 단일 찬송가의 편찬을 위하여 작업한 결과, 1983년에 총 558장의 『통일 찬송가』가 간행되어 찬송가 사용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2006년부터는 총 647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21세기새찬송가』를 사용하고 있다. 이 찬송가의 특징은 한국인이 작사한 찬송이 121곡(18.7%), 한국인이 작곡한 찬송이 127곡(19.6%)나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통일 찬송가』에 한국인이 작곡한 찬송가가 17곡인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만한 증가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