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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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한 교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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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성결교는 개신교의 한 교파이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Wesley, J.)의 완전주의적 입장을 강조하며 형성된 교파이다. 한국 성결교는 김상준, 정빈에 의해 1907년 5월 서울에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이 세워지면서 시작되었다. 1921년 3월에는 제2대 총리인 킬보른이 내한하면서,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라는 명칭으로 교단이 형성되었다. 1950년대 말에 교회연합운동(에큐메니컬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이를 둘러싸고 교회가 양분되었다. 현재 성결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 두 교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차
정의
개신교의 한 교파.
개설

19세기 말 미국에서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Wesley, J.)의 완전주의적 입장을 강조하며 형성된 교파이다. 완전주의적 입장이란 기독교인은 내적인 죄뿐만 아니라 외적인 죄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완전한 성결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죄 없이 완전한 기독교적 삶을 이루게 해주는 회심(回心)의 경험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대체로 성서의 무오류성 · 축자영감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등을 신뢰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을 지니고 있으며, 세속적 관습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연원 및 변천

20세기 초에 등장하기 시작한 오순절운동(pentecostalism)은 성결교운동과 맥을 같이하다가 완전주의를 보다 급진적으로 적용시켜 성령(holy spirit)의 은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결교 교단에서는 나사렛교회가 1919년 총회에서 ‘오순절’이란 명칭을 삭제한 이래 오순절교회와의 차이성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성결교운동이 활발해지면서 1897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국제성결연합과 기도연맹(International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이 창설되었고, 순례성결교회(Pilgrim Holiness Church)라는 교단이 형성되었다.

1900년 같은 곳에서 하느님의 성서학교(God○s Bible School)와 선교사훈련원이 설립되었는데, 국제성결연합과 성서학교는 한국의 성결교운동의 모체가 되는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01년 일본 동경(東京)에서 조직된 동양선교회는 미국 오하이오주 전신기술자 출신의 카우만(Cowman, C. E.)과 그의 회사 동료인 킬보른(Kilbourne, E. A.)이 중심이 되어 창설, 의료나 교육 등을 통한 간접선교가 아니라 개인선교와 노방선교 등의 직접선교방법을 활용하였다. 동양선교회는 주로 서민층을 중심으로 신자층을 형성해 나갔으며, 곳곳에 복음전도관(福音傳道館)을 세워 전도집회를 열고 성서를 가르쳤다.

한국 성결교의 역사는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金相濬) · 정빈(鄭彬)에 의해 1907년 5월 서울에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東洋宣敎會福音傳道館)이 세워지면서 시작되었다.

1910년 영국의 토머스(Thomas, J.) 목사가 초대 감독으로 파견되어 동양선교회의 사업을 관장하였고, 1911년에는 구리개[銅峴]에서 이사한 무교정에 복음전도관을 개축하고 경성성서학원을 설립하는 등 발전을 거듭하였다.

1921년 3월에는 제2대 총리인 킬보른이 내한, 한국 감독직을 겸임하게 되면서 한국이 동양선교회의 중심역할을 하게 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전국 33개소의 교회와 기도처를 통괄할 교회조직이 요구되어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라는 명칭으로 교단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1917년에 조직된 일본보다 4년이 늦은 것이지만 중국보다는 4년이 앞선 것으로, 1929년 연회(年會)가 창립될 때에는 75개 교회와 남녀교역자가 2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1922년부터는 교단잡지인 『활천(活泉)』이 발행되어 문서선교활동이 활발해졌다. 1930년대는 조직을 정비한 성결교회가 한국 목사들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시대였다.

남만주(南滿洲)와 일본의 선교도 이때 이루어져 보다 앞서 개척된 동만주(東滿洲)지역과 더불어 활발한 해외선교가 행해졌으며, 1933년 4월에는 제1회 총회를 개최하여 박현명(朴炫明)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고 최고의결권은 이사회에 위임하는 등 교단조직이 정비되었다.

그러나 1936년에는 교단분열이 일어나 일부 평양 출신의 목사들이 ‘하나님의 교회’라는 교단을 분립하였다.

1930년대 말부터 일제가 기독교회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키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1940년에는 선교사들을 강제추방했으며, 교단지인 『활천』을 폐간하였다. 그리고 1943년 12월에는 교회를 해산시켰다.

8 · 15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재건총회가 소집되어, 명칭을 기독교대한성결교회(基督敎大韓聖潔敎會)로 바꾸고 경성신학교도 서울신학교로 개칭하였으며, 폐간되었던 『활천』도 복간하였다.

1947년에는 그때까지 사용되던 이사회제도와 총회제도의 두 체제를 완전한 의회제도로 개정하여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면서, 자주적으로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갈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6 · 25전쟁으로 수많은 교회가 파괴되었고 155명의 교인들이 순교했으며, 서울신학교 교장 이건 목사를 비롯한 다수의 교직자들이 납북당했다. 그 뒤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피난갔던 교인들이 환도하여 교회재건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57년에는 교단설립 50주년을 맞아 기념관 설립 · 기념출판사업 등이 이루어졌으며, 교육사업에도 많은 역점을 두어 몇몇 중 · 고등학교가 설립되었고 사회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950년대 말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를 중심으로 교회연합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이 에큐메니컬운동을 둘러싸고 교회가 양분되어 1961년 제16회 총회 때 기독교복음수호를 내걸고 다수의 목사들이 퇴장하여 교단이 분열되었다.

이들은 1962년 4월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명칭을 확정하고 새로운 신학교설립과 국제기독교연합회(ICCC) 가입을 결정하여 또 다른 교단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복음동지회(NAE)로부터 동시탈퇴가 이루어져 분열명분이 사라지자, 계속해서 합동노력이 이루어져 1965년 7월에는 하나의 교단으로 다시 통합되었다.

그러나 예수교성결교회의 일부 세력들은 계속 합동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교단존속을 강력히 주장하여 완전한 합동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72년에는 예수교성결교회 내에서 신학노선을 둘러싸고 다시 분열이 일어나, 기존의 예수교성결교회는 웨슬리안 알마니안 신학에서 이탈하여 장로교도 성결교도 아니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단의 세력에 의해 1973년 6월 또 다른 교단이 분립되었다.

이를 혁신파예수교대한성결교회 혹은 예수교대한성결교회혁신총회라 부르며 독자적인 성결신학교를 세우는 등 3개 교단으로 분리되었으나, 1988년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두 교단이 재결합함으로써, 현재 성결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예수교대한성결교회 두 교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한국성결교회사』(기독교대한성결교회 역사편찬위원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1992)
『성결교회여성사 1907∼1987』(배가례, 기독교대한성결교회출판부, 1987)
『한국성결교회성장사』(안수훈, 기독교미주성결교회 출판부, 1981)
『성결교회사』(이천영,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출판부,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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