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은 조선 후기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 교회 최초로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다. 1756년(영조 32)에 출생하여 1801년(순조 1)에 사망했다. 자는 자술, 호는 만천이고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1783년 북경에서 선교사들로부터 필담으로 교리를 배우고,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784년 김범우 집을 신앙집회소로 정하고, 정기적인 신앙의 모임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 정약종 등과 함께 체포되어 4월 8일 서대문 밖 형장에서 대역죄로 참수되었다.
서울 남대문 밖 반석방(盤石坊) 중림동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마재[馬峴]의 정재원(丁載遠)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정약전(丁若銓) · 약현(若鉉) · 약종(若鍾) · 약용(若鏞)과 처남매부 사이가 되었다.
1780년(정조 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 때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이 남인 소장학자들 사이에 활발히 연구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서학에 접하게 되었다. 또한 서학 모임의 중심 인물인 이벽(李檗)과도 자연 친교를 맺어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 약 40일간 그 곳에 머물면서 선교사들로부터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뒤, 그라몽(Gra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784년 수십 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 · 묵주(默珠) · 상본(像本)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이벽 · 권일신 · 정약용 등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상의하여 명례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신앙집회소로 정하고 정기적인 신앙의 모임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가지던 중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한때 배교하였지만, 곧 교회로 돌아가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성사(堅振聖事)를 집전하는 등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하였다.
1787년에는 정약용과 반촌(泮村:지금의 惠化洞)에서 천주교 교리를 강술하는 등 교회활동을 영도하였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교회법에 어긋난 행위임을 알고는 이 조직을 해산하고 성직자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1790년 음서로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2월 서부도사를 거쳐 6월에 평택현감이 되었다. 때마침 1790년 북경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 주교의 명을 전하자, 보유론적(補儒論的)인 이해에서 출발한 그의 신앙은 유교적 예속과 천주교회법의 상치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어 고민하던 끝에 다시금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 · 권상연(權尙然)의 폐제분주(廢祭焚主)로 인한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권일신(權日身)과 함께 체포되어 서양 서적을 구입해 온 사실과 1787년의 반회사건(泮會事件)이 문제되어 문초를 받고 관직을 삭탈당했다.
그리고 1792년 초에는 평택현감으로 부임하여 향교에 배례하지 않았다는 소문 때문에 다시 한 번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이 일어나 천주교 서적을 조선에 전한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충청남도 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났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 · 정약종 · 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체포되어 4월 8일 서대문 밖 형장에서 대역죄로 참수되었다.
그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다. 즉, 1868년(고종 5)에 아들 신규(身逵)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하고, 1871년에 증손인 연구(蓮龜) · 균구(筠龜)가 제물포에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