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 중국 북경(北京)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은 이벽(李蘗) 등과 한국천주교회를 창설하고 전교에 힘쓰던 중 1785년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으로 박해를 받아서 한때 교회활동이 주춤해졌으나, 1787년 10월경에 반촌에 있는 김석태(金錫泰)의 집에 소장반유(少壯泮儒)들과 천주교서적을 연구, 토론하게 된다.
그러한 사실을 안 이기경(李基慶)이 천주교 배척론자인 홍낙안(洪樂安)에게 폭로하니, 척사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랐다. 그로 인하여 직접적인 박해는 내려지지 않았으나, 서학서(西學書)의 도입과 유포가 문제되어 1788년에 전국에 천주교관계 서학서를 색출, 소각하는 조처가 내려졌고, 그 뒤 박해가 일어나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