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박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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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사건
1859년(철종10) 말에서 1860년(철종 11) 8월에 걸쳐 일어난 천주교 박해의 옥사(獄事).
이칭
이칭
경신사옥
목차
정의
1859년(철종10) 말에서 1860년(철종 11) 8월에 걸쳐 일어난 천주교 박해의 옥사(獄事).
내용

1839년(헌종 4) 기해사옥 때 천주교 박해에 공을 세운 금위대장이던 임성고(任聖皐)의 아들인 좌포도장 태영(泰瑛)이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으로 우포도장 신명순(申命淳)과 함께 자행한 옥사였다.

원래 철종은 온건한 성품인데다가 당시의 집권세력인 안동김씨(安東金氏)도 비교적 유화정책을 썼으므로, 천주교는 조용한 가운데 착실하게 교세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

이에 개인적으로 천주교를 사학시(邪學視)하고 반감을 품고 있던 임태영은 신명순과 의논하여 조정의 허락도 없이 서울과 지방의 교인촌을 급습, 30여명의 신자들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시켰다.

그러나 포졸들이 천주교인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재산의 약탈과 방화 등 불미스러운 만행이 야기되고, 이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자, 조정에서는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김씨 집안의 훈련대장 겸 호조판서인 김병기(金炳冀)와 병조판서 김병운(金炳雲) 등이, 천주교도 학살로 나라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어왔다는 예를 들어 천주교인 체포를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두 포도대장은 파면되고 천주교인 체포도 금지되었으며, 이어 8월 7일(음력) 투옥된 교인들이 철종의 명에 의하여 모두 석방됨으로써 9개월간에 걸친 옥사가 종식되었다.

박해기간 중 숨어서 전교활동을 해오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재빨리 피신하였고, 신부 최양업(崔良業)이 경상도 죽림이라는 곳에서 체포되어 잠시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옥사가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참고문헌

『증보(增補) 한국천주교회사』(유홍렬, 가톨릭출판사, 1981)
『한국천주교회사』(달래 저, 최석우·안응렬 역주, 분도출판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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