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북경에서 천주교에 입교하고 귀국한 이승훈(李承薰)이 이벽(李檗)ㆍ권일신(權日身) 등과 명례동(明禮洞:서울 명동)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져오다가 다음해 3월, 도박단속을 위하여 순라 하던 포졸들에게 적발되었다.
이때 교인들은 이승훈, 정약전(丁若銓)ㆍ약종(若鍾)ㆍ약용(若鏞) 삼형제, 권일신 부자 등 10여명으로 이벽의 교설(敎說)을 듣고 있다가 체포되어 모두 형조로 끌려갔다.
그러나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이들을 석방하고, 김범우만 투옥하였다. 이때, 권일신은 이윤하(李潤夏)ㆍ이총억(李寵億)ㆍ정섭(鄭涉) 등 다섯 사람과 함께 형조에 들어가 압수한 성상(聖像)을 돌려달라고 교섭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이것을 계기로 이용서(李龍舒) 등 유생들이 척사상소(斥邪上疏)를 올려 그들을 처벌하도록 여론을 일으켰으나, 성학(聖學:儒學)이 흥하면 사학(邪學)은 자멸할 것이라고 믿고 있던 정조는 김범우만을 경상도 밀양의 단장(丹場)으로 유배시켰다.